Friday, September 5, 2014

사랑 속에서 진리를 말하라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 에베소서 4장 15절 (현대인의 성경)

요즘 가장 가슴 속에 남는 성경 구절이다. 한 단어 한 단어 곱씹게 된다. 그냥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

기독신학에서 신은 온전한 진리 그 자체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최소한 진리의 일부는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뜻을 전부 알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또한 모든 진리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하는 비유는 실제로 인간이 맞닥뜨리는 한계에 비하면 지나치게 스케일이 작은 비유가 아닐까 싶다. 신과 모든 진리를 마주하는 인간은, 냄새를 맡지 못 하는 개미가 항공모함 안에서 그 배의 크기와 모양을 가늠하려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진리의 한 조각 정도는 가지고 있다. ("진리의 한 조각"은 "일리"가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혹자는 자기가 지닌 진리의 파편을 높이 들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여긴다. 리처드 도킨스의 최근 글에 그러한 태도가 잘 드러난다. 아무리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라도 감정을 배제하기만 한다면 이성이 전부 해결해 줄 것이란 논지. 지난 150년간 주류 논리가 되어버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그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그러한 "이성"을 숭배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감정적 버튼을 훤히 만천하에 드러내고 다니며, 그 버튼이 눌리면 부들부들 떨며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가? 도킨스의 무신론은 그 자체가 거대한 감정적 반응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그것은 다른 무신론자들도 그를 비판하게 만드는 기제가 되었다. 상대방의 관점에 대한 배려 없이 "내가 틀린 말했냐"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리있는 말 한 마디, 진리의 한 조각을 내세우며 위세하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기독신학에서 이는 스스로를 지옥으로 보내는 첫 걸음이다. 티모시 켈러는 C.S. 루이스의 저서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온 지옥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옥은 괴로운 곳이며, C.S. 루이스는 이 괴로움의 원천을 설명한다. 인간의 교만, 근거 없는 피해망상, 자기 연민이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어! 다 멍청이들이야!라고 확신에 차서 외친다. 그들의 인간성은 완전히 사라지며, 사리분별력 또한 사라져버린다. 자기중심성이란 감옥에 최종적으로, 완전히 갇혀버린 것이다. 그들의 교만은 서서히 점점 더 거대한 버섯구름을 형성하며 확장한다. 그들은 계속하여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탓하며 산산히 조각난다. 이것이 지옥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민함을 바탕으로 남보다 좀 더 큰 진리의 조각을 들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진리의 조각이 남들 것에 비해 얼마나 더 큰지나 자랑하고 다닌다면 그 진리의 파편은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그 파편 앞에서 자신이 작아질 뿐이며, 결국 자기 눈에만 커보이는 진리의 파편 안에 함몰될 뿐이다. 그 주화입마의 상태가 기독교의 지옥이다. [1]

일리있는 말을 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지적능력만 갖춘 이라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일층 어려운 것은 사랑으로 일리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이는 다른 이들이 들고 있는 진리의 파편들 또한 모으게 되어, 최종적 진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된다.

'싸가지 있는 진보'가 요즘 화두이다. 그러한 화두를 던진 강준만 본인의 역사를 생각하면 실소가 나올 수도 있고, 그 화두에 대한 진중권의 비판 또한 일리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실명비판을 해야한다'며 기세등등하게 덤비던 논객이 (당시 한국사회에서 실명비판이 필요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시련을 겪은 다음에야 '싸가지 있는 진보'론을 들고 나온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반증이 아닌가 싶다.

-주석-
[1] C.S. 루이스와 티모시 켈러의 지옥론에 대한 기독신학적 반론은 Iain Campbell의 Engaging with Keller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