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2024-03-05T00:38:01.448-08:00AAK! ScrapsAsk a Korean! 블로그 운영자의 자투리 생각 공간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Blogger25125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21486303764150686402017-02-23T17:47:00.000-08:002017-02-23T18:01:47.605-08:002016 U.S. Presidential Election Reader<div style="text-align: justify;">
2016년 미 대선의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이었으며, 그 충격파에 걸맞게 오만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여러 갈래의 분석 중 가장 잘 주장된 서적 및 기사들을 모아봤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분석 1. 힐러리 클린턴 선거팀의 잘못된 캠페인 전략.</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Edward Isaac-Dovere, Politico:</b> <a href="http://www.politico.com/story/2016/12/michigan-hillary-clinton-trump-232547">How Clinton Lost Michigan--and Blew the Election</a>. 미시건,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세 주를 합쳐 7만 표 이하로 승부가 갈린 선거라는 점에 집중하면, 클린턴 캠프의 미시건 주 전략 실패가 뼈아팠다. 미시건 현장에 있었던 자원봉사자들은 위험신호를 감지했고 계속 증원요청을 했으나, 잘못된 데이터에 의존하던 클린턴 선거본부는 증원을 거부했고, 본부가 위험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분석 2. 후보로서의 클린턴 매력 부족, 혹은 민주당 유권자들의 안일함.</b><br />
<b><br /></b>
<b>Michael D. Regan, PBS: </b><a href="http://www.pbs.org/newshour/updates/voter-turnout-2016-elections/">What does Voter Turnout Tell us about the 2016 Election?</a> 특히 중서부에서 2016년의 클린턴은 2012년 오바마에 비해 모든 유권자층에서 표를 덜 받았고, 상대적으로 2012년의 롬니 수준을 지켜낸 2016년의 트럼프가 결국 승리했다는 분석. 대통령이 재선을 노리는 선거가 아닌 경우 대개 투표율이 올라가지만, 이례적으로 2016년에선 19개 주에서 투표율이 하락했다. 오바마가 특출할 정도로 투표율을 상승시키는 정치인인지, 민주당 유권자들이 클린턴 우세를 짐작하고 안일하게 대응했는지는 불분명하다.<br />
<b><br /></b>
<b>분석 3. 중서부의 쇠락.</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J.D. Vance:</b> <a href="https://www.amazon.com/Hillbilly-Elegy-Memoir-Family-Culture-ebook/dp/B0166ISAS8/ref=sr_1_1?ie=UTF8&qid=1487617318&sr=8-1&keywords=hillbilly+elegy">Hillbilly Elegy</a>. 이번 선거 최고의 베스트셀러. 가난한 오하이오 출신으로 군대를 다녀와 예일 로스쿨을 나온 작가의 자서전. 민주, 공화 양당이 합심하여 정책적으로 중서부를 포기했고, 이것이 원래 그 지역에 살던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출신의 바람직하지 않는 문화와 결합하여 절망적 상황을 창조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선거에 대한 직접적인 코멘트는 하지 않지만, 작가의 결론에다가 "고로 중서부 주민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다"라는 부연을 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분석 1과 연관이 있으나, 선거 전략적 문제가 아니라 그 하부에 있는 트렌드를 관찰한다는 점이 다르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분석 4. 하층민의 절망.</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Chris Arnade, the Guardian:</b> <a href="https://www.theguardian.com/society/2016/nov/03/trump-supporters-us-elections">What I Learned After 100,000 Miles on the Road Talking to Trump Supporters</a>. 원래 작가는 미국의 마약중독 및 자살 문제에 대해 연구하려 했으나 마약문제가 심각하고 자살률이 높은 지역일 수록 트럼프 지지가 높다는 점을 관찰하고, 트럼프 지지자들은 '위대한 미국'이란 이미지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며, 위대한 미국 국민에 걸맞지 않는 자신의 삶에 절망하고, 그러한 삶까지 이르게 한 상류층을 저주하는 의미로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해석.</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분석 2와 비슷하고 실제로 중서부에 많이 집중하지만, 분석 자체는 중서부에 국한되지는 않는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분석 5. 신자유주의 좌파의 실패.</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br /></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John B. Judis: </b><a href="https://www.amazon.com/Populist-Explosion-Recession-Transformed-American/dp/0997126442">The Populist Explosion: How the Great Recession Transformed American and European Politics</a>.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부유층에 반발하는 포퓰리즘의 동력이 생겨났으나, 오바마는 이 동력을 좌파적 방향으로 흡수하지 못 했기 때문에 결국 이 동력은 유럽과 비슷한 극우파로 이동했다는 분석.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분석 2, 3과 비슷한 맥락이나 경제 정책에 중점을 두어 미국과 유럽을 뭉뚱그렸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br />
<br />
<b>Matt Stoller, Washington Post:</b> <a href="http://www.pbs.org/newshour/updates/voter-turnout-2016-elections/">Democrats Can't Win Until They Realize how Bad Obama's Financial Policies were</a>. 좀 더 미시적으로, 미국의 민주당은 빌 클린턴 시대 이후부터 민중의 당의 되기를 포기했으며, 그러한 기조를 이어받은 오바마는 세계 금융위기라는 절호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만을 돕고 주택소유자들의 구제를 게을리 함으로서 노동자 친화적인 정책을 수립할 기회를 걷어차버렸다는 분석.</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br /></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분석 6. 소수자가 되어가는 백인들의 불안감.</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br /></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Justin Gest: </b> <a href="https://www.amazon.com/New-Minority-Politics-Immigration-Inequality/dp/0190632550">The New Minority: White Working Class Politics in an Age of Immigration and Inequality</a>. '백인'이란 변인에 집중하고 그들이 경제정책 및 이민정책에 어떠한 식으로 반응하여 어떠한 정치적 선택을 내리는가를 분석하여 인종적 정치역학을 분석. 분석 3, 4와 연계된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연구. 인종차별주의라는 변인에 집중하진 않지만, 영국와 미국 유권자들을 '백인'이란 층위로 연결하여 분석한다는 점에서 암묵적으로 이 부분을 조명한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br /></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분석 7. 흑인 대통령에 대한 백인들의 반감과 인종차별.</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Dylan Matthews, Vox:</b> <a href="http://www.vox.com/policy-and-politics/2016/10/15/13286498/donald-trump-voters-race-economic-anxiety">Taking Trump Voters' Concerns Seriously Means Listening to What They're Actually Saying</a>. 실제 트럼프 지지자들의 경제적 위치를 봤을 때 대부분의 트럼프 지지자들은 중산층이고 실제로 경제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계층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며, 트럼프 지지의 주 동력은 인종차별주의란 분석. 경제적 변인에 중점을 둔 분석 5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br /></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분석 8. 인구학적 될놈될.</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br /></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Nate Silver, FiveThirtyEight:</b> <a href="https://fivethirtyeight.com/features/clintons-ground-game-didnt-cost-her-the-election/">Clinton's Ground Game Didn't Cost Her the Election</a>. 클린턴이 미시건이나 위스컨신에서 캠페인을 안 하기도 했지만, 캠페인을 매우 열심히 한 펜실베니아에서 패배 격차가 위스컨신 패배 격차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봤을 때, 미시적 선거 전략 혹은 캠페인의 자원배치 결정은 선거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분석. 분석 1과 배치되는 주장.<br />
<br />
<b>개인적 분석.</b><br />
<br />
개인적으론 데이터가 결여된 분석은 참조는 하지만 그다지 신뢰는 하지 않기 때문에, 분석 3과 4는 크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미국사회의 큰 흐름을 설명한다고는 볼 수 있지만, 이 분석들에 나타난 사람들을 두고 "그래서 이들은 트럼프를 지지한다"라는 결론이 선뜻 나오지는 않는다.<br />
<br />
분석 1은 분석 8의 데이터로 논파당하고, 분석 5는 진보진영 사이에선 대세로 잡혀가고 있지만 분석 7 데이터가 지적하는 바에 할 말이 없다. 그러므로 현재로선 분석 2 (클린턴 개인의 역량부족, 혹은 오바마가 먼치킨이었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 분석 6 (경제적 요소가 섞인 인종차별성 경향), 분석 7 (그냥 인종차별), 분석 8 (미시적 선거전략은 별 의미 없음) 정도로 가닥을 잡고 있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11612671072317437652016-03-21T16:54:00.000-07:002016-03-21T16:54:15.736-07:00New Orleans Thoughts<div style="text-align: justify;">
Perhaps I went in with too much expectations. New Orleans was sitting at the very top of the U.S. cities that I have been wanting for visit. This itch has been with me for nearly a decade. The city has everything I like. Cajun food! Jazz! Gambling! Drinking!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Never meet your heroes, they say. Perhaps they should also say never visit your dream city.</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New Orleans is a city awaiting for the best version of itself. This is the kindest way I could say what was really going through my mind: New Orleans is a shitty place that is wasting all the great things that are available to it.</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Food? I <b><i>love</i></b> cajun food, but street-level quality of the food is not that great, and expensive cajun food is very good but not paradigm-shifting. Beignet from Cafe Du Monde is delicious, but the cafe itself is disgusting. Most restaurants did not serve more than two types of hot sauce--Tobasco and Crystal.</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Jazz? Shocking how few jazz clubs there actually were on Frenchmen Street. I would have a better shot at listening to good jazz in New York, Chicago or even Washington D.C.</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Drinks? Cheap, disgusting garbage for 18-year-olds. One would think New Orleans would be the city for cocktails, or excellent local bourbons and rums. Not so.</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Gambling? No riverboat casino. Just a sad little Harrah's.</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Even the tarot card reading that I got off Bourbon Street was crap. And this is the U.S. capital of voodoo and occult!</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I wonder if the city does not attract talent, the types of young, ambitious men and women with snobby aesthetics pursuing the better version of everything. (They are often referred to as "hipsters.")</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10169660656653162372015-12-20T13:40:00.002-08:002015-12-20T13:42:26.231-08:00종교와 시민사회: 미국 모델 대 프랑스 모델<div style="text-align: justify;">
여러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혼재하는 공동체의 경우, 종교와 시민사회는 어떤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크게 미국 모델과 프랑스 모델이 있다고 생각하며, 두 모델의 차이는 종교와 시민사회 중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모든 모델이 그러하듯이 아래 모델들은 몇 단계의 추상화를 거쳐 나온 결과이며, 현실은 모델과 방향성은 같으나 일치하진 않는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center;">
<a href="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hawUwqs2rmzXUhivFD_do6Cvr0QonSh7yS2sJB78VH6QmoIQzaVgSd4Y6sVo7tf5Ojy36V4nJMe6LcfXv_exT91kcm5Y5w-CFvxB6JbgO-r1THHxq_MXN0qO0DwX_ugIzyIufOGMvKK88P/s1600/US+Model.jpg" imageanchor="1"><img border="0" height="320" src="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hawUwqs2rmzXUhivFD_do6Cvr0QonSh7yS2sJB78VH6QmoIQzaVgSd4Y6sVo7tf5Ojy36V4nJMe6LcfXv_exT91kcm5Y5w-CFvxB6JbgO-r1THHxq_MXN0qO0DwX_ugIzyIufOGMvKK88P/s320/US+Model.jpg" width="302" /></a></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미국 모델은 위와 같다. 여러 종교 (작은 원)들이 중앙에 모여 시민사회를 형성한다. 일종의 종교 공화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br />
<br />
미국은 여러 개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세워진 나라이다. ("다 기독교 아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18세기 유럽인들의 관점에선 퀘어커교와 영국 국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감이 있다.) 심지어 몇몇 주는 *오직* 종교의 자유만을 위해 세워진 것을 감안하면 (이를테면 펜실베니아는 퀘이커교도들이 설립한 주), 위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역사적 결과물이다.<br />
<br />
반면 프랑스 모델은 아래와 같다.<br />
<br />
<div align="center">
<a href="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jHiAkxxh6fnbohyNYkqT2TNf-dsr1TIUqir4IRji2niEtc6IkmVtf4jk_aeMUSXiYmCi4hT47D65UB9dU3AjvDVqw-Q10RuKoaFoSrPM2BkCrEqpqT-DRDG3stb1wvRWgYt8pSclGlG8aN/s1600/French+model.jpg" imageanchor="1"><img border="0" height="320" src="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jHiAkxxh6fnbohyNYkqT2TNf-dsr1TIUqir4IRji2niEtc6IkmVtf4jk_aeMUSXiYmCi4hT47D65UB9dU3AjvDVqw-Q10RuKoaFoSrPM2BkCrEqpqT-DRDG3stb1wvRWgYt8pSclGlG8aN/s320/French+model.jpg" width="274" /></a></div>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기존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천주교에 대한 의식적 저항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종교의 영향을 거부한 세속적 사상 (laicite)에 기반하여 작동한다. 이 형태 또한 프랑스의 역사적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br />
<br />
이 두 모델의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br />
<br />
<ul>
<li>미국의 시민사회는 중심이 비어있다. 다양한 종교의 공약수로 형성된 시민사회이기 때문에, 미국의 시민사회는 자체적인 동력이 없다. 그러므로 미국의 시민사회는 흰색으로 처리했다.</li>
<li>프랑스의 시민사회의 중심은 세속주의며, 이것은 자체적인 동력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독자적 색깔이 있다.</li>
</ul>
<br />
<ul>
<li>궁극적으로 보면 미국에선 무신론자는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필수적인 공약수 중 하나 (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빠져있기 때문이다.</li>
<li>궁극적으로 보면 프랑스에선 종교인은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시민사회의 중심동력인 세속주의와 배치되기 때문이다.</li>
</ul>
<div>
<br /></div>
<ul>
<li>미국의 시민사회는 수축의 압력을 받는다. (화살표 방향 참조) 공약수의 크기에는 최대 한계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의 공공영역은 제한되어 있으며, 공공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계약과 거래의 양상을 띤다.</li>
<li>프랑스의 시민사회는 팽창의 압력을 받는다. 만인의 이성적 사고의 기반한(다고 생각하는) 세속주의에는 스스로의 범위를 제한하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의 프랑스의 공공영역은 미국의 공공영역보다 비대하며 (도면의 크기 참조), 공공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하나의 이상을 향한 자기 혁신의 양상을 띤다.</li>
</ul>
<div>
<br /></div>
<ul>
<li>미국은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공약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종교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유대인 여성은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는 경우 유대교가 인정하는 이혼을 할 수 없지만, 미국 법원은 이에 개입하지 않는다. </li>
<li>프랑스는 종교의 사회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시민사회 자체의 동력으로 대체한다. 특정 종교가 시민사회 자체의 동력과 크게 유사한 경우 (이를테면 천주교)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대체 과정은 매우 지난하다.</li>
</ul>
<div>
<br /></div>
<ul>
<li>미국은 새로운 종교를 흡수하기 쉽다. 최소의 공약수만 받아들이면 바로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무슬림은 유럽의 무슬림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주류사회에 동화된다. 타종교에 대한 차별과 적대는 공약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선에서만 이루어진다.</li>
<li>프랑스는 새로운 종교를 흡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종교의 사회적 부분을 시민사회에 완전히 내놓은 다음에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새로 진입하는 종교에게 이는 지나치게 값비싼 거래이다. 프랑스 시민사회 형성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종교 (=천주교) 정도만이 이러한 거래를 할 역량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든 새로운 종교는 차별과 적대를 받는다.</li>
</ul>
</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89710579592485543772015-08-12T16:26:00.002-07:002015-12-20T13:41:40.377-08:00Writing About Writing<div style="text-align: justify;">
I never identified with writers who agonize over writing. Certainly their struggles are legitimate, but that simply has not been me. I think, and I write. Then I think some more, and I edit what I wrote. It has always been a fast process. I am a fast writer.</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What I did not realize until recently is that I have a limited reservoir of writing in me. It doesn't matter what I write about--I can only write a certain amount in a given period of time. This reservoir is a scarce resource from which I, currently, draw in order to write a number of things <b><i>except</i></b> the blog and the book.</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Walking away from them was easy--too easy that it scared me a bit. I need to return to them. So I write to remind myself.</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17318338850538737802015-07-13T02:53:00.003-07:002015-07-13T02:54:07.099-07:00Layperson as a Sanction Giver in the Internet Age<div style="text-align: justify;">
One of the distinctive features of the Internet age is the manner in which social etiquette is enforced. The mechanism itself is not new: it is in essence peer pressure, which has existed as long as the human race has existed. The distinctive part is the seeming disproportion between the violation and the punishment. For a thoughtless comment on the Internet, a job and livelihood are commonly lost.</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Why is this so? One reason may be that people rarely think of themselves as sanction-givers. People usually think of themselves as merely expressing moral outrage, unaware that such expressions, once piled up, are sanctions in and of themselves.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Some may be aware that their expressions are also sanctions, but unaware of the scale and proportionality of sanctions. This is partially because one person is unable to properly anticipate the effect of one's statement multiplied by the thousands. It is also partially because people simply are not trained--not even informally--as a sanction-giver. Expression of outrage requires no training; the moral intuition takes care of that. But the moral intuition is insufficient to create an effective sanction giver, who is essentially a policy maker. What level of sanction is enough to correct behavior? What level of sanction is fair, compared to other cases? Intuition alone does not answer these questions; a rigorous rational inquiry must also follow. Moral intuition unchecked by rational inquiry is what we see on the Internet--the permanent state of righteous indignation, seeking the next witch to burn.</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24769201925031658072015-05-25T09:51:00.000-07:002015-05-25T09:51:44.163-07:00기독교의 핵심<div style="text-align: justify;">
사람들이 모두 다른만큼, 신앙에 다다르는 길이 전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 존 칼뱅, C.S. 루이스와 티모시 켈러의 글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 신학자들이 설파한 기독교의 핵심에 크게 공감하여 신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아래 내용은 티모시 켈러의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_mK65lpveSM">이 설교</a>를 제 언어로 해석한 것입니다. 내용은 많이 비슷하지만 번역은 아닙니다. 신앙을 첫 접하는 사람들,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center;">
* *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십계명이 무엇인지, 그 중 제1계명이 무엇인지는 다들 아실겁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이건 대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 "우상"이 진정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십계명에 등장하는 "우상"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우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아주 어려운,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해야 합니다. 즉: <u style="font-weight: bold;">당신은 왜 삽니까?</u> 이렇게 자살하기 쉬운 세상에서, 왜 꾸역꾸역 아침에 일어나 밥을 입에 밀어넣고 그닥 가고 싶지도 않은 학교나 직장에 나갑니까? 내일은 뭐가 달라지길래 오늘을 사나요?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런 질문이 어렵다면, 반대로 접근해도 됩니다: <b><u>당신의 최악의 악몽은 뭔가요?</u></b>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살할 것 같은가요? 직장에서 해고 당하면? 돈이 다 없어지면? 가족이 전부 죽으면? 사고를 당해서 얼굴이 흉칙하게 망가지면?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u>여기서 나오는 대답이 당신 삶의 의미이고, 당신의 존재를 떠받치는 당신의 신입니다.</u></b>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우리 주변에선, 직장과 커리어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커리어에 모든 것을 던집니다. 가족과의 화목도, 자신의 건강도 안중에 없고, 그저 일에 목숨을 겁니다. 오지의 원주민이 화산의 신에다 처녀를 공양하듯, 이들은 "커리어"라는 우상에다가 자신의 가족과 건강을 팔아넘깁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자녀"라는 우상도 흔합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부모들은 자녀에 모든 것을 겁니다. 그렇게 과도한 기대에 엇나가버리는 자녀들의 모습 또한 흔합니다. "자녀"를 우상으로 삼은 부모는, 잘못돼버린 자녀를 보는 순간 온세상이 무너져버립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갑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a name='more'></a><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하지만 진정한 지옥도는 그 목표를 실제로 이루었을 때 펼쳐집니다. (여기서 "지옥"은 가볍게 쓰는 말이 아니라 문어적 표현입니다.) 어떤 이들은 정말로 자신들의 우상을 끝까지 쫓아가서 삶의 목표를 이뤄버립니다. 많은 돈을 벌기도 하고, 엄청난 명예를 얻기도 하고, 대단한 자녀를 정말로 키워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표를 성취해버린 순간 기쁨은 곧 사라집니다. 안 사라지는 기쁨은 없습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기 때문입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다시 한 번 그런 희열을 맛보려 새로운 목표를 세워보지만, 그런 새로운 목표는 또 하나의 새로운 우상일 뿐입니다. 그 새로운 목표를 이루어도, 성취의 기쁨은 다시 한 번 사라집니다. 우상을 차지한 사람은 궁극의 공허함을 맛보거나,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갈증의 지옥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에 공허하고, 그 무엇을 이루어도 성취감이 계속되지 않기에 갈증에 불탑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건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무한히 존재하는 경우입니다.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자기 아들 자랑만 하는 어머니는, 그 아들이 우상이고 아들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 아들이 정말로 성공해버려서 어머니의 봉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 그 어머니는 종종 (흔히 '빈둥지 신드롬'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극도의 허무함 속에 빠져버립니다. 최고의 운동선수들은 정점에서 은퇴하더라도, 그 정점을 다시 찾을 수 없기에 평생 그 순간만을 되새기면서 삽니다. (마이클 조던이 은퇴 후 어떤 싸이코 짓을 하고 살았나 검색해보세요.)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런 예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영원히 거론할 수 있습니다. 왜 영원히 거론할 수 있느냐면, 이것이 영원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삶에 의미가 없으면 영적으로건 물질적으로건 죽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불완전한 피조물에 두게 되면, 그 삶은 자연히 불완전해집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그렇다면 완전한 삶은 무엇일까요? 대체 어디다 삶의 의미를 두어야, 이 갈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인간 본성에 대한 궁극의 질문이고, 기독교는 이 질문에 간명한 답을 제공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히 변치않는, 궁극적 삶의 의미입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왜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않느냐면, 다른 모든 우상과는 달리 신은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합니다. "만들어낸 자"만이 완벽하고 완전한, 영원히 영혼을 적시는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여기서 모든 우상은 사실은 좋은 것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성공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족을 버리라고 가르치지도 않고, 물욕을 버리라고 가르치치도 않습니다. 그저 그 좋은 것들의 <b><u>상대적 가치</u></b>를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우상은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이든 그것을 삶의 중심에 가져다 놓으면, 그것이 당신의 우상입니다. 그 우상을 쫓으면 당신의 삶은 망가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 놓으면, 삶의 좋은 것들은 그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대중가요로 대부분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시인과 촌장 하덕규 씨의 신앙 고백입니다. <가시나무>의 가사는, 신이 아닌 다른 것을 삶의 중심에 놓았을 때 일어나는 영혼의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div>
<blockquote class="tr_bq" style="text-align: justify;">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br />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br />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br />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br />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br />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br />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br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blockquote>
<div style="text-align: justify;">
내 속엔 "내"가 ('내 자아'가) 너무도 많아 "당신" (하나님)이 쉴 곳이 없다는 고백. 가장 궁극적인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바램, 내 안의 어둠,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이 내 삶의 중심에 있으면, 내 자아도 괴롭고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다른 사람을 도울 여력도 없습니다.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이것이 우상을 섬기는 삶의 모습입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휘발유로 가는 자동차에 알코올을 넣어도 차는 어느정도까진 굴러갑니다. 우상을 영혼의 중심에 놓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상을 희구해도 인생은 불완전하게나마 살아집니다. 하지만 완벽한 삶, 영혼이 만족되는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희구하여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삶의 중심인 사람은 돈을 아무리 벌어도 그 돈에 눈멀지 않고, 자녀를 사랑하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일하지만 직장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이건 그 사람의 마음이 각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피조물이란 본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믿는 핵심교리입니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91801762384691402582015-02-12T09:37:00.000-08:002015-02-12T20:32:21.666-08:00'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div style="text-align: justify;">
<b>0. 열면서</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요즘 트위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태그가 유행하고 있고, 저는 거기에 동참하지 않겠다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은 상당한 (대부분 부정적인)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반향의 대부분은 별반 대꾸할 가치가 없는 정념의 발산이었지만, 진중하게 반론을 제기하신 분도 간혹 계셨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a href="https://twitter.com/rmffkdls/status/565322338506641408">https://twitter.com/rmffkdls/status/565322338506641408</a></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a href="https://twitter.com/rmffkdls/status/565323070278479872">https://twitter.com/rmffkdls/status/565323070278479872</a></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a href="https://twitter.com/rmffkdls/status/565323922552655873">https://twitter.com/rmffkdls/status/565323922552655873</a></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a href="https://twitter.com/rmffkdls/status/565324657025642497">https://twitter.com/rmffkdls/status/565324657025642497</a></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반론 트윗 내용을 연결했습니다: </div>
<blockquote class="tr_bq" style="text-align: justify;">
"흥미로운 논의군요.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선 한 여성이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보단 한 남성의 선언이 훨씬 큰 파급력을 지닙니다. 기득권층이기 때문이죠. 흑인을 지지하는 백인들처럼. 이런 상황에선 선언이 가벼워질수록, 하나의 패션이나 유행에 가까울수록, 여성운동에겐 전략적으로 좋습니다. 지금처럼 단순한 선언 조차 무겁게 여겨지는 분위기는 운동에 매우 장애가 되지요. 가벼움은 무기입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진짜 페미니스트"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선언을 저어하는 것은, 1. 현대 한국에서 이 선언이 다양한 측면으로 얼마나 무거운지 반증하며, 2.선언을 더욱 무거이 만드는군요. 사회운동은 어디까지나 숫자의 문제이며, 허수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가벼워 유행이 된다면 그건 전략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큰 효과를 가져옵니다."</blockquote>
<div style="text-align: justify;">
제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 싶어서 이 포스트를 씁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1. 하나의 일화</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흑인을 지지하는 백인" 얘기가 나왔으니, 그와 비슷한 일화를 하나 소개 드리겠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제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 낯간지럽지만,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합니다. 전 대학 시절부터 미국 인종관계에 관심이 많아 그때부터 관련 활동에 투신해왔습니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한국과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제 블로그를 운영한지는 거의 10년이고, 졸블로그가 나름의 인기를 모아 <a href="http://askakorean.blogspot.com/p/aak-on-media.html">제법 영/미 주류 언론에도 소개되고 기고도 하고 있는 위치입니다</a>. 즉, 최소한 아시안 아메리칸 사회에서 전 순전한 필부필부는 아니란 말씀입니다. 곧 설명드릴 사건에 대한 배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런 설명을 드립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table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 class="tr-caption-container"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tbody>
<tr><td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static1.squarespace.com/static/5048e660e4b0bd178ab35a57/t/545368c9e4b0efaf8e015cbd/1414752457927/"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d></tr>
<tr><td class="tr-caption" style="text-align: center;">콜베어 리포트 배너입니다.<br />
(<a href="https://www.google.com/search?q=colbert+report&es_sm=93&source=lnms&tbm=isch&sa=X&ei=ncLcVODYC8ixyASExYDoAg&ved=0CAoQ_AUoAw&biw=854&bih=484#imgdii=_&imgrc=peMDKRFSc5jFAM%253A%3Bov79SwyMJHl2QM%3Bhttp%253A%252F%252Fstatic1.squarespace.com%252Fstatic%252F5048e660e4b0bd178ab35a57%252Ft%252F545368c9e4b0efaf8e015cbd%252F1414752457927%252F%3Bhttp%253A%252F%252Fwww.ftvlive.com%252Ftodays-news%252F2014%252F10%252F31%252Fcolbert-report-to-wrap-up-before-christmas%3B648%3B210">source</a>)</td></tr>
</tbody></table>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미국 인기 시사 코메디 프로그램 중 "콜베어 리포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년에 이 프로그램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을 차별한다고 보일 소지가 있는 개그가 나왔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a href="http://askakorean.blogspot.com/2014/03/against-hashtag-warriors.html">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a>.) 곧 아시안 아메리칸 활동가들이 반응했고, 전선이 짜여졌습니다. 강경파는 "이것은 차별이다, 사과해야한다"라는 주장이었고, 제가 속한 온건파는 "전체적 맥락을 보면 차별할 의도가 보이지 않으니 넘어가야한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강경파들은 강경파답게 온건파에게 "배신자"라며 맹공했습니다. 제게도 엄청난 욕설과 비난이 쏟아졌죠. 활동하면서 당연히 있는 일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저를 가장 극렬하게 공격한 사람들은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아니라,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에 끼어있는 백인 활동가들이었습니다. "나는 저것을 차별로 보지 않는다"라고 했더니 백인활동가들이 저보고 "너는 백인 우월주의에 찌들은 인종차별주의자다"라고 하기도 했고요. 평생 1초도 인종을 이유로 차별받아보지 않은 이들이 20년 가까이 활동을 해온 저에게 "네 생각은 상관없고, 우리가 이것은 차별이라고 정했으니 받아들여라"라고 주장하는, 지극히 우스운 꼬락서니였습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제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태그를 달 수 없는 이유는, 저런 백인 활동가의 우스꽝스런 모양새를 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다음으로 넘어갑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a name='more'></a><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2. 가벼워질 수 없는 이유</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선언이 가벼워질수록, 하나의 패션이나 유행에 가까울수록" 좋다고 하셨죠. 다른 여러 사람도 "당장 뭔가 대단한 걸 하라는 것도 아니고, 태그 하나 다는 것이 무슨 대수냐"라는,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그런 말에 저는 이렇게 반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그 태그에 별 의미가 없다면, 제가 달건 안 달건 무슨 상관인가요?"</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건 제 성격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전 직업병이 있어서, 단어 하나하나의 뜻, 개념어의 의미에 지극히 민감합니다. 때문에 "페미니스트"처럼 함의가 큰 단어를 패션 악세사리처럼 달고 다니는 것은 제겐 무리입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지향점이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단순한 패션 악세사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전 회의적입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사회운동에 허수란 없다"라는 말씀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실질적 효과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운동의 숫자는 전부 허수입니다. 엄청난 숫자를 동원하고도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인터넷 운동은 너무 많아 일일히 열거할 수도 없으니, 두 가지 예만 들어드리겠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table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 class="tr-caption-container"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tbody>
<tr><td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ainesvillescene.com/wp-content/uploads/2014/05/Bring-Back-Our-Girls-Michelle-Obama.jpg" height="426"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width="640" /></td></tr>
<tr><td class="tr-caption" style="text-align: center;">(<a href="http://gainesvillescene.com/wp-content/uploads/2014/05/Bring-Back-Our-Girls-Michelle-Obama.jpg">source</a>)</td></tr>
</tbody></table>
<div style="text-align: justify;">
작년 초에 미국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시작했던 해쉬태그 캠페인입니다. 보코 하람에게 납치된 천 명의 나이지리아 소녀들을 구해달라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이 캠페인에 동참하여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이 태그를 달았습니다. 기부금도 줄을 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사람 중 하나인 미국 영부인이 시작한 이 캠페인, 실효를 거두었을까요? 천 명의 소녀들은 다 돌아왔을까요? 돌아왔는지 안 돌아왔는지 지금 신경쓰는 사람이나 있습니까?</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국내 예를 들어볼까요? 세월호 이후 반응은 어떻습니까? 사고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 프로필에 노란 리본을 달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이 "우리가 잘못 했다, 잊지 않겠다, 이런 사고는 다시는 없어야한다"라고들 했죠. 정말 그렇게 됐나요? 몇 달만에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가 터져 많은 생명들이 스러졌습니다. 그 많던 노란 리본과 자책의 목소리가 판교의 희생자들이 추락할 때 밑에 쿠션이라도 깔아주던가요?</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오직 진실만이 진실이며, 실질적인 것만이 실질적입니다. 우리가 떠드는 말은, 실존적 현상을 불러일으키기 전까지는 공허할 뿐입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3.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그래서 저는 "페미니스트"라는 패션 악세사리를 달 생각이 없습니다. 그 단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 단어로 제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 또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단어의 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 하면, 그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table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 class="tr-caption-container"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tbody>
<tr><td style="text-align: center;"><img height="433" src="https://timedotcom.files.wordpress.com/2014/08/beyonce-feminist-vma.jpg?w=1100"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width="640" /></td></tr>
<tr><td class="tr-caption" style="text-align: center;">(<a href="https://timedotcom.files.wordpress.com/2014/08/beyonce-feminist-vma.jpg?w=1100">source</a>)</td></tr>
</tbody></table>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미국 최고의 가수 중 하나인 비욘세는, 최근 공연에서 위 사진처럼 거대하게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여 큰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내부적 반박이 들어왔습니다. <a href="http://gawker.com/beyonce-is-a-terrorist-according-to-bell-hooks-1573771398">저명한 페미니스트 벨 훅스는 </a>이러한 시도는 "안티-페미니스트"적이며 비욘세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테러리스트"나 마찬가지라고 맹비난했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 외에도 페미니스트 내부의 결은 무한합니다. 그 어떤 사회운동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제가 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한다면, 그 다양한 결 중 내가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도 정해야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건 앞서 말씀드린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좌표 설정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배우고 관찰하고 숙고한 다음 결정하면 되지 않냐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결정은 언제나 틀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실존적 경험에 의거하지 않은 좌표 설정은 현학적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득권을 지닌 남자이고, 평생 여성이 겪는 차별을 1초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희 집은 부모님과 남동생 하나 뿐이라, 심지어 대리공감할 수 있는 누이조차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자정하려 노력해도 제 안에 성차별적 요소가 독소처럼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독소는 "페미니즘"이란 개념어를 이해하려는 제 지적 시도를 굴절시키고, 감염시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러한 감염은 실질적 해악을 초래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기득권층인 제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면, 특히 외부적에서 봤을 때 나름의 긍정적 효과는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며 "페미니즘"이란 집단에 참여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의 내적 역학 또한 바뀌게 됩니다. 저는 기득권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무게중심이 제 방향으로 어느 정도 이동하겠지요. 여기에 제가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을 대입하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여성에게 목소리를 주는 페미니즘의 본연을 저버리게 됩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제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저도 저를 공격한 백인 활동가 꼴이 나겠지요. 평생 여성이 겪는 차별을 1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남자꼭지가, 현학적 논리를 구사하며 내 반대입장에 서있는 여성이 직접 겪은 경험을 깔아뭉개는 희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4. 하지만 지지는 합니다</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런 식으로 같은 운동을 하는 세력 내에서도, 기존 사회의 기득권층이 그 운동이 본디 대변하는 비-기득권의 목소리를 뺐는 상황은 이미 충분히 연구가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인종운동 내에서는 Critical Race Theory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선의를 가지고 비-기득권층을 돕고자 하는 기득권층이 빠지는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저같은 기득권층은 어떻게 해야 이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요? Critical Race Theory에 바탕을 둔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옆으로 피해줘야 합니다. 제가 프로야구팀을 아무리 사랑하고 돕고 싶다하더라도, 제가 운동장에 난입해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건 민폐일 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관중석에서 박수도 쳐주고, 응원가도 부르고, 기념품도 사주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도 필요합니다. 관중 없는 프로 경기는 없으니까요.</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비유를 걷어내고 말하자면, 일단 제가 감히 라벨을 붙이고 그 라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는 행위는 피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라벨을 붙인 순간 의미부여는 피할 수 없습니다.) "페미니스트"라는 라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린 당사자들이 정할 일입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런 자세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무심함이 아니며, 반대는 더더욱 아닙니다. 제 안에 성차별적 독소가 있을지언정, 남녀가 평등하다는 대전제에 반대할 정도로 미개하진 않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해왔듯이, 개별적이고 현실적 사안에 집중하려 합니다. 성차별에 대한 현실적 사안은 많고도 많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안에 대해 공부하고, 사안의 당사자들의 입장을 살펴본 뒤, 그 입장에 비추어 제 위치를 설정하고, 행동하는 것. 그 뿐입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제가 이렇게 가닥을 잡더라도 실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저는 여전히 남녀평등적 가치를 지향하고, 거의 대부분 사안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선호하는 방향을 지지하고 투표할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는 제가 "페미니스트"라는 라벨을 달 건 달지 않건 차이가 없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아-- 제가 제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든 아랑곳 없이, 그저 시키는 것을 개처럼 따르지 않는 존재에 분노하는 어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웃음)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9663953586350036082015-01-29T14:07:00.000-08:002015-01-29T14:07:03.473-08:00T 형제에게 보내는 서신<div style="text-align: justify;">
신앙의 형제 T님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3)</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제게 이메일로 신앙 상담을 하시려 연락을 주셨는데, 이렇게 좀 더 공개적인 형태로 답변을 드려서 송구합니다. 그러나 T님의 고민은 T님 혼자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저희 신앙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큰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에, T님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에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 공간을 빌었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T님은 동성애자시라고 말씀 주셨습니다. 비록 T님이 다니시는 교회에선 적극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회를 하거나 달리 탄압을 하진 않지만, 동성애는 창조원리에 위배되는 죄악이며 정신병이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의 성지향성을 포기할 수 없기에, 신앙생활에서 마음에 큰 짐을 짊어지게 되실 것 같다고도 하셨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렇게 큰 고민을 저를 믿고 털어놓아 주셔서 과분함을 느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조금이라도 T 형제님의 짐을 덜고자 노력하려 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1.</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먼저 상기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가 동성애를 대하는 시각은 하나가 아니며, 동성애 이슈가 대두된 것이 최근이니만큼, 그 이슈에 대한 신학적 반응 또한 확정된 것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란 점입니다. 성공회의 대부분은 동성애를 긍정하며, 각 수백만 명의 신도를 지닌 미국 최대의 루터교 종파와 장로교 종파 또한 동성애를 긍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종파가 동성애에 대한 재해석을 거칠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물론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쉽지 않다"라는 말은 양방향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쉽게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신앙의 형제들에게 얼마나 큰 괴로움을 끼치는지, 그것이 진정 주님의 사랑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아래 클릭하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갑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a name='more'></a><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1.A.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동성애를 긍정하는 신학의 개론은 Matthew Vines의 God and the Gay Christian에 쉽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일단 이 책부터 읽어보시길 권유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바인즈의 가장 중요한 논점은, 현대에 대두된 성지향성이란 이슈는 성경에 직접적인 해설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란 것입니다. '레위기나 고린도서, 로마서에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비슷한 시기의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동성을 향한 음욕에 가까우며, 현대의 성지향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대사회에 동성애적 행위는 있었을지 모르나, 성지향성 같은 개념은 없었습니다. 즉 동성 간에 성행위는 있었지만, 이성 관계를 완전히, 100 퍼센트 대체하는 동성을 향한 성지향성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성경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고기를 먹는 사람이 가끔 야채를 먹는 행위라면, 현대식 성지향성의 개념은 특정 인간은 완전히 초식동물이며 고기를 소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발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현대식 성지향성이란 개념이 완전히 새로운 발견이라고 하여, 만물을 창조한 주님의 섭리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레위기나 로마서, 고린도서에 등장하는 동성애와는 분리될 수 있고, 만인은 주님의 사랑 앞에서 동등하다는 우리 신앙의 대원칙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것이 바인즈의 주장입니다. 동성애를 긍정하는 종파들의 신학적 해석은 대체로 이 궤를 따릅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1.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모든 신학적 주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바인즈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궁극적으론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틀리더라도, 주님의 은혜라는 궁극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전인수적 성경 해석은 신자로서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이 해석이 사실 전혀 아전인수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기독교 율법의 특징은 세속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스러움과 도덕적 삶을 강조하는 기독교 율법은 세속적 관습보다는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율법은 종교 지도자들이 꼬장꼬장하게 자잘한 계율까지 다 지키라고 시키는 것 또한 거부합니다. 우리는 유대교인과는 달리 레위기의 오만 자잘한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예수는 율법을 무시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했다는 죄목 하에 살해당했다는 점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도덕이 현재는 보수적이라고 여겨지고 있지만, 바울의 시대에 부부 간의 성행위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쾌락을 긍정하는 것 또한 당시에는 혁명적일 정도로 진보적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바인즈의 주장은 보수적 종교의 입장과는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세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게이 활동가들의 입장들과도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 게이 활동가들의 대부분은 자유주의적 (리버테리언) 성향을 띱니다. 즉 서로 동의하는 성인끼리라면 동성 성행위를 하든, 한 번에 여러 명과 난교를 하든 타인이 무슨 상관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바인즈의 주장은 이러한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문란한 성생활을 금지하는 레위기, 로마서, 고린도서의 경고는 바인즈에겐 여전히 유효하며, 현대적 개념의 성지향성을 충족하는 동성 관계, 즉 언약으로 맺어져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만이 성경적으로 허락된 동성 관계입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런 주장은 세속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인습에 의존하는 바리새인 같은 신도들은 동성 간의 관계에 알레르기를 보일 것이며, 영과 육을 분리하여 사랑 없이 육신의 즐거움만 좇는 세속의 사람들은 이것을 고루하고 갑갑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매튜 바인즈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2.</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신학만으로 이 서신을 끝마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저희 신앙의 참된 힘은 삶의 신비로움을 완전히 분쇄하고 모든 질문에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거대한 진실을 중심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재정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br />
<br />
물론 동성애가 본인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T 님께는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접근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T 형제님의 일상이 본인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만 점철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제 외람된 생각입니다. 저희 신앙 또한 신도들의 성생활을 규제하는데만 골몰하는 것도 아닙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기독교 도덕의 중심은 성(性)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죄는 악하지만, 여러 죄 중 가장 덜 악한 죄다"라고 했습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T 형제님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에게 좀 더 현실적,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는 성지향성이 아니라 고립감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눈에 뜨일까봐 연애도 할 수 없고, 성지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 신앙 공동체와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없고, 이러다 주님과도 유리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고민이, 성지향성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 좀 더 즉각적이고 무겁게 짓누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다행히도 저희의 신앙은 이러한 고립감에 익숙합니다. 기독교는 본디 약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신앙입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릴지 몰라도 여호와는 나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시편 27:10) 특정한 경우 주님을 위해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있는 역량은 그 나름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9:12) 형제님이 더 직접적으로 느끼는 모든 고민과 괴로움을 주님의 발 아래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br />
<br />
우리 현세의 삶은 완전하지 않으나, 다음의 삶은 완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몸소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없고 우는 것도, 아픔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3-4) 이 희망을 믿으셔서 매일 은혜가 충만한 하루를 보내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79220870799894444952015-01-25T12:58:00.000-08:002015-01-25T12:58:43.592-08:00"교회의 으뜸가는 죄"[이 <a href="https://twitter.com/pastordan/status/559151869592080385">연작 트윗</a>의 주요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br />
<br />
<div style="text-align: justify;">
미국 교회의 으뜸가는 죄는 그 교회의 울타리 바깥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번영하는 목회와 그렇지 않은 목회의 가장 기본적 차이는 바로 이 능력, 즉 이 테이블에 앉아있지 않은 이들은 누구인가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이 사람들을 상상할 능력이 없이는, 즉 신이 바라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인지할 능력 없이는 지속적, 효과적, 신앙적으로 이 테이블을 계속 확장할 수가 없다. 이것이 죄인 이유는, 교회가 자라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회를 필요로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게되기 때문이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87644603015899391592015-01-16T07:36:00.003-08:002015-01-16T07:37:30.231-08:00"나는 샤를리다"의 진짜 의미<div align="center">
<table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 class="tr-caption-container"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tbody>
<tr><td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pixel.nymag.com/imgs/daily/intelligencer/2015/01/07/charlie-hebdo-rally/07-charlie-hebdo-rallies-003.w529.h352.2x.jpg" height="265"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width="400" /></td></tr>
<tr><td class="tr-caption" style="text-align: center;">(<a href="http://pixel.nymag.com/imgs/daily/intelligencer/2015/01/07/charlie-hebdo-rally/07-charlie-hebdo-rallies-003.w529.h352.2x.jpg">source</a>)</td></tr>
</tbody></table>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 많은 파리시민들은 무엇을 지지하려 거리로 나선 것일까.</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표현의 자유"라는 흰소리는 집어치워라. 샤를리 엡도를 비꼰 프랑스 코메디언 듀도네는 <a href="http://www.theguardian.com/world/2015/jan/14/dieudonne-arrest-facebook-post-charlie-coulibaly-paris-gunman">'테러를 옹호한다'라는 명목으로 즉시 체포되었지만</a>, 수많은 파리 시민들이 "나는 듀도네다"라는 사인을 들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시위를 하지는 않는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테러에 대한 거부와 인명 존중?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다. 샤를리 엡도가 네오나치 잡지였다고 가정해보자. 인명은 똑같이 존중되어야 하고 테러는 나쁜 것이라는 원칙을 천명하기 위해 과연 수백만 명의 프랑스 시민들이 "나는 네오나치다"라는 사인을 들고 거리를 행진할 것인가?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진의는 말이 아닌 행동에서 볼 수 있다. 샤를리 엡도 테러 이후 마린 르 펜의 민족전선 지지도는 나날히 상승하고, 수많은 모스크와 무슬림의 생활권에는 방화와 총격이 난무한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그래서 다시 물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사인을 들고 행진하는 프랑스인들은, 대체 무엇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가.</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73790690423752278172015-01-09T15:37:00.001-08:002015-01-09T15:37:46.907-08:00설득 대 개종<div style="text-align: justify;">
<a href="http://aakscraps.blogspot.com/2015/01/blog-post.html">앞선 포스트</a>에서 설득보다 강한 힘은 개종이라고 소개했다. '개종의 예술'을 논하기 전에, 설득과 개종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왜 개종은 설득보다 강력한지에 대한 논의가 선결되어야할 것 같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개종'이란 단어는 필연적으로 '종교'라는 개념을 소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종'은 꼭 종교를 바꾼다는 내용은 아니다. '세계관'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세계관을 바꾼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나의 정의는 이렇다: 담론의 시작점을 바꾸는 것. 거대하고 높은 산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첫 걸음을 어떻게 내딛고, 열 번째, 백 번째 걸음을 어느 방향으로 내딛느냐에 따라서 내려오는 길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그 큰 산의 표면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발걸음의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것이 '설득'이라면, 시작하는 산 자체를 바꾸는 것이 '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설득이 전투의 기술이라면, 개종은 그 전투가 시작도 하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외교술이다. 때문에 자연히 개종은 설득보다 강하며, 진정한 사회적 변혁은 대개 설득이 아닌 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방백. 인간사회는 뚝뚝 떨어진 산 하나씩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큰 산이 모이고 겹친 고원이며 서로 다른 산에서 내려와도 아래쪽에 겹치는 길은 많다는 점은 상기해야할 것이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 사실은 인간사회 모든 면에서 드러난다. 이를테면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란 개념을 통해,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증거를 쌓아올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 (이 포스트에서 쓰이는 '세계관'이란 개념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이 등장하여 기존의 사실을 재정돈함으로서 이루어진다고 관찰했다. 즉 사실 하나하나를 연구하는 것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정돈하여야하는 원칙을 바꾸는 것이 과학의 발전이란 것이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개종이 설득보다 강하다는 것은 이론적인 논의만이 아니다. 임상학적으로도 개종된 인간은 설득에 면역이 생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a href="http://www.vox.com/2014/4/6/5556462/brain-dead-how-politics-makes-us-stupid">2013년 예일대학교 실험에서는, 실험군을 둘로 나누어 실질적으로 같은 응용수학문제를 풀게 했다</a>. 하나의 실험군에게는, 지문에 정치색이 짙게 들어간 응용문제를 주었고 (총기소유에 대한 내용), 또 다른 하나는 정치색이 없는 문제를 주었다 (단순 피부병에 대한 내용).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결과는? 수학적으로는 완전히 같은 문제였지만, 정치색이 들어간 문제의 정답률은 널을 뛰었다. 문제가 본인의 평소 정치적 성향과 합치한 경우 정답률은 크게 상승했고, 정치적 성향이 반대인 경우 정답률은 하강했다. 게다가 이 추세는 수학을 잘 하는 사람일 수록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즉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평소의 정치적 성향 (=이 또한 '세계관'의 일부)에 거스르면 글자 그대로 *지능이 떨어진다*. 세계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설득'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이성적 사고의 틈새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현실적 경험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이념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취사, 해석한다는 건 두 번 말하면 입 아프다. 세계관이 '친일파 타도'인 사람에게는 영덕 대게 그림도 욱일기며, 세계관이 '때려잡자 빨갱이'인 사람에게는 전두환도 민주주의의 화신이다. 이들에게 설득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이념적 성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언정, *세계관이 없는 사람이란 없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이 유연한 사람도 결국에는 본인의 세계관과 합치하는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이고 설득된다. 즉 설득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앞서 말한 설득의 세 요소뿐만 아니라, 상대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나의 세계관과는 어떻게 다른지도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개종은 쉽지 않다. 설득보다 효과가 큰만큼 난이도도 훨씬 높다. 일생에 한 번이라도 개종을 겪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며, 여러 타인을 개종시키는 것은 물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엄청나다. 물 위를 걷는 것은 초현실적일지 모르나, 개종은 현실 자체를 휘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54990918491246381052015-01-06T17:23:00.000-08:002015-01-06T17:24:28.194-08:00설득의 예술<div align="center">
<blockquote class="twitter-tweet" data-partner="tweetdeck">
우리사회 갑질은 새로울것도 없다만 백화점 알바생 3명이나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하루 일당 못받을 각오로 당당히 부당함에 맞설 패기도 없는 젊음. 가난할수록 비굴하지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 좋겠다.<br />
— 조기숙 Kisuk Cho (@leastory) <a href="https://twitter.com/leastory/status/552152375155097600">January 5, 2015</a></blockquote>
<script async="" charset="utf-8" src="//platform.twitter.com/widgets.js"></script></div>
<br />
<div style="text-align: justify;">
오늘 하루 트위터를 뜨겁게 달군 조기숙 교수의 트윗이다. 무엇보다 사실관계가 틀렸기 때문에 머쓱해지는 내용이다. ("갑질"은 없었다. <a href="http://media.daum.net/issue/909/newsview?newsId=20150106092707767&issueId=909">마트 주차장의 CCTV를 판독한 결과</a> 알바생이 먼저 고객에게 위협적 행동을 했으며 처음에 사과도 건성으로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 것이 훨씬 더 설득력있다. 무슨 잘못을 했건 무릎을 꿇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갑질"이란 개념어의 정의가 나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리라.)</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사실관계를 차치하더라도, 저 트윗은 실패했다. "비굴해지지 말라"라는 조 교수의 주장은 전혀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저 알배생들의 사정도 모르면서 어디서 꼰대질이냐"라는 거센 역풍만 초래했다. 설득에 실패한 것이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설득처럼 강력한 힘은 세상에 또 있지 않다. 폭력이나 위협 없이 타인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 이 얼마나 큰 힘인가. 어떻게 해야 잘 설득할 수 있는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돌릴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은, 인생의 기본 기술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설득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나는 아르스토텔레스의 고전적 해설보다 나은 방법론을 아직 본 적이 없으므로, 그 내용을 설명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세 가지 유형"을 설파했는데, 에소스 Ethos, 페이소스 Pathos 그리고 로고스 Logos 이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에소스는 '화자에 대한 신뢰도'이다. 발화자가 직접 경험한 내용이나, 발화자가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는 내용을 사용한 주장은 그 설득력이 높다. 페이소스는 '감정선'이다. '감정에 호소'라는 표현은 대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은근한 감정적 소구력이 있는 주장이 더 설득력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로고스는 '논리'다. 탄탄한 논리가 있는 주장은 또한 설득력이 강하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설득의 현장을 전투라고 본다면, 에소스는 지형이요 페이소스는 병사 개개인의 전투 능력, 로고스는 작전과 전술이라고 생각한다. 셋 중 하나만 유리해도 이길 수는 있을지 모르나, 승리의 확률을 극대화하려면 마땅히 세 요소가 전부 유리해야한다. 설득도 마찬가지다. 상황에 따라 이 셋 중 하나만 가지고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고, 셋 중 둘만 가지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득력을 극대화하려면 설득의 세 가지 유형이 전부 필요하며, 세 가지 유형을 전부 갖춘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높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에 미루어 보면 조 교수의 트윗이 왜 실패했는지 곧 알 수 있다. 조 교수의 로고스는 기실 나쁘지 않다. 조 교수의 논리는 "불의에 맞서 저항하라"이며, 이 로고스는 틀리지 않다. 뒤집어 생각해보라. 조 교수가 "살다보면 먹고살기 위해 무릎 좀 꿇을 때도 있는 거다"라고 했다면 엄청난 칭찬을 받았을 것인가?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문제는 나머지 두 요소다. 조 교수는 에소스에서 이미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이는 조 교수의 트윗경력에서 상당부분 기인한다. (조 교수가 어쩌다 트위터에서 이런 위치까지 왔는지, 이런 위치에 처한 것이 정당한 것인지는 논외로 하겠다.) 트윗경력을 제한다하더라도, 먹고살만한 50대의 대학교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의 삶에 대한 담론에 별다른 무게감을 가져올 수 없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하지만 조 교수의 결정적 실패는 페이소스다. 앞뒤 사정이 어찌되었든, '무릎을 꿇었다'라는 자극적 사실에 이미 감정은 격앙되어 있었고, 또한 트위터는 진상에게 당하는 젊은 비정규직 서비스업 종사자들로 넘쳐나기에, 언제든지 저 무릎 꿇은 알바생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곳이다. 이 감정선을 읽지 못하고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를테면 불리한 지형에서 허기진 병사들을 데리고 전투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휘관의 전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즉 조 교수의 로고스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패배의 확률이 높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방백. 조 교수를 비판한답시고 "우린 모두 이렇게 약하기 때문에 저항 따위 불가능하다"라는 얘기를 꺼내드는 사람이 많았다. 저항하지 않겠다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 조 교수의 발언이 어디가 잘못되었나 인지하지 못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촌극이다. 주장에 반론을 펼치려면 약점을 노려야 하며, 조 교수의 약점은 페이소스이다. 그걸 놔두고 조 교수의 강점인 로고스를 공략하니 스텝이 꼬이는 것이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범위를 넓혀서 보면, 인터넷에서 흔히 일어나는 '병림픽'의 양상도 이러한 각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익명의 인터넷에서는 에소스가 작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빈 자리에서 페이소스와 로고스가 널뛰듯 담론을 휘두른다. 신상을 속이는 주작질도, 통계자료의 공정함을 두고 일어나는 개싸움도 어떻게는 에소스를 소구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설득의 하수들은 인터넷의 우중은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이는 풀파워의 1/3 밖에 쓰지 못하는 주제에 내뱉는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또 저런 불평하는 이 중 제대로 논리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추. 앞서 "설득처럼 강력한 힘은 세상에 또 있지 않다"고 술했으나, 사실 설득보다 강력한 것이 하나 있다. "개종"이다. 개종의 예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76911127050048644802015-01-01T00:01:00.000-08:002015-01-01T00:01:01.530-08:002015년 신년사<div style="text-align: justify;">
2015년에는 독자분들 모두 의미있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흔히들 "행복한 삶"을 꿈꾸고, 기원합니다. 다들 "행복하려고 사는 것 아니냐"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을 하는 이들에게 "행복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대답은 시원치 않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가족," "건강," "물질적 풍요" 정도의 대답이나 나오는 것이 고작입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하지만 가족, 건강,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건강한 젊은이는 그 나름의 걱정이 있고, 풍요로운 부자는 또 그 사람 나름의 걱정이 있습니다. 또한 가족이 없고, 건강이 안 좋고 경제사정이 안 좋아도 기운차게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 주변에는 흔합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참 이상합니다. 모두가 바라는 것이라면 다들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도는 쉽게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이것은, 사실은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들 바라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행복하지 않아도 사람은 살 수 있지만, 의미를 잃어버린 순간 사람은 죽습니다. 의미있는 삶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수십 년, 평생의 불행 정도는 거뜬히 이겨낼 수 있으며, 삶 자체를 초개같이 던져버리기도 합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인간의 영혼이 엔진이라면, "의미"는 그 엔진을 가동시키는 연료입니다. 휘발유로 가는 자동차에 물을 넣으면 움직이지 않듯이, 인간의 영혼에 "의미"가 아닌 그 어떤 것을 넣어도 영혼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미가 부여된 영혼은 그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합니다. 의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자연히 가슴에 기쁨이 벅차오릅니다. 의미있는 삶을 사는 인간에게도 불행과 고통은 찾아오지만, 다른 사람을 꺾어버릴만한 불행과 고통 앞에서도 의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초연하고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영원히 변치않는, 하루하루의 삶에 동기가 부여되는 의미를 찾는 2015년이 되시길 바랍니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span style="font-family: Helvetica Neue, Arial, Helvetica, sans-serif;">(그렇다. 이는 <a href="https://twitter.com/AskAKorean/status/418764650721722368">2014년 신년사</a>의 재탕이다. 불만있는 분에게는 전액 환불을 약속드린다.)</span></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26976809729526065812014-11-01T09:54:00.000-07:002014-11-01T09:54:15.739-07:002014년 10월 29일자 퇴고와 기교<a href="http://askakorean.blogspot.com/2014/10/history-behind-seo-taijis-sogyeokdong.html">서태지의 신곡 "소격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포스팅</a>을 올렸다.<br />
<br />
<b>He actually grew up in the neighborhood, having attended the nearby Jaedong Elementary School.</b><br />
<br />
- 최근 내 글이 "입에 짝짝 붙는다"라는 상찬을 들었다. 아마도 글을 쓸 때 언제나 리듬감을 고려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시가 아닌 산문인 경우에도 리듬감이 있어야 읽기 쉽고 내용전달이 잘 된다. 이 문장의 리듬감에 주목하기 바란다. 쉼표 앞은 짧고 힘있고, 쉼표 뒤는 조금 더 편안하고 서술적이다. "강-약"의 리듬감이다.<br />
<div>
<div>
<br />
<div>
- "having"처럼 현재진행형을 사용해서 앞 문장을 부연하는 것은 자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형태이다. 꼭 숙지할 것을 권한다.</div>
</div>
</div>
<div>
<br /></div>
<b>To be sure, the situation was better than North Korea's--but not by that much.</b><br />
<div>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3px; text-align: justify;"><br /></span></div>
- "not by much"라는 표현은 상당히 유용하다. 외울 것을 권한다.<br />
<div>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3px; text-align: justify;"><br /></span></div>
<b>It is believed that approximately 1,100 students were forcibly drafted during the School Greening Project; six were killed in the process.</b><br />
<div>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3px; text-align: justify;"><b><br /></b></span></div>
- 이 문장에서 세미콜론으로 연결할지, 마침표로 두 문장을 만들지 많이 고민하다 전자를 택했으나, 아직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여섯 명이 죽었다"를 부각시키려면 마침표, 빨리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려면 세미콜론. 결국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이 어려운 것이다.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52324617145089534762014-10-18T19:09:00.001-07:002014-10-18T19:09:37.049-07:002014년 10월 18일자 퇴고와 기교<a href="http://askakorean.blogspot.com/2014/10/koreas-labor-productivity-and-how-to.html">한국의 노동 생산성에 대한 포스트</a>를 썼다.<br />
<br />
<b>As much as Koreans love their food, gastronomical pleasure alone does not explain why Korea has nearly seven times more restaurants per capita than Americans do.</b><br />
고급 영어일 수록 추상명사가 주어로 오는 경우가 많다. 위 문장에서는 gastronomical pleasure 대신 The fact that Koreans love their food alone does not explain (...) 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이 경우 글의 수준은 급격히 떨어진다.<br />
<div>
<br /></div>
<div>
<b>If Korea's corporate culture were dragging down Korea's labor productivity, one should expect to see that drag across all sectors. </b><br />
<br />
이것은 좋은 글쓰기라기보다는 내 개인적 스타일이나, 일반적인 내용을 논의할 때 one을 주어로 쓰는 것은 you를 쓰는 것보다 수준 높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한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39607529186140538652014-10-12T20:23:00.000-07:002014-10-12T20:27:51.612-07:002014년 10월 6일, 10월 11일자 퇴고와 기교<div style="text-align: justify;">
<a href="http://askakorean.blogspot.com/2014/10/50-most-influential-k-pop-artists-9.html">신해철</a>과 <a href="http://askakorean.blogspot.com/2014/10/korea-and-great-war.html">1차 세계대전</a>에 대한 글을 본 블로그에 올렸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As we climb higher into the rarefied heights of Korean pop music history, a concise statement of an artist's importance is approaching ever closer to impossible.</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Rarefied는 아주 좋아하는 단어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쓰려고 하는 단어이다. 자신의 트레이트마크처럼 종종 쓰는 어려운 단어를 지니는 것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계발하는데에 도움이 된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The best pop artists do not simply influence the artists who come after them; they change the society around them. </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두 문장을 세미콜론으로 연결했다. 적절한 곳에 쓰이는 세미콜론은 글이 늘어지지 않게 해준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Fortunately, the Germans stuck around just long enough to teach the locals how to make proper beer.</b></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just [형용사] enough to"처럼 위트 있는 숙어 또한 머릿속 단어장에 많이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11940370538359760092014-09-05T16:10:00.003-07:002014-09-06T19:44:31.940-07:00사랑 속에서 진리를 말하라<blockquote class="tr_bq" style="text-align: justify;">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blockquote>
<div style="text-align: justify;">
- 에베소서 4장 15절 (현대인의 성경)</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요즘 가장 가슴 속에 남는 성경 구절이다. 한 단어 한 단어 곱씹게 된다. 그냥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b>사랑으로</b> 진리를 말해야 한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기독신학에서 신은 온전한 진리 그 자체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최소한 진리의 일부는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뜻을 전부 알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또한 모든 진리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하는 비유는 실제로 인간이 맞닥뜨리는 한계에 비하면 지나치게 스케일이 작은 비유가 아닐까 싶다. 신과 모든 진리를 마주하는 인간은, 냄새를 맡지 못 하는 개미가 항공모함 안에서 그 배의 크기와 모양을 가늠하려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모든 인간은 진리의 한 조각 정도는 가지고 있다. ("진리의 한 조각"은 "일리"가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혹자는 자기가 지닌 진리의 파편을 높이 들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여긴다. <a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CcK&articleno=16202270&categoryId=759324&regdt=20140810170953">리처드 도킨스의 최근 글에 그러한 태도가 잘 드러난다</a>. 아무리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라도 감정을 배제하기만 한다면 이성이 전부 해결해 줄 것이란 논지. 지난 150년간 주류 논리가 되어버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그것이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그러한 "이성"을 숭배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감정적 버튼을 훤히 만천하에 드러내고 다니며, 그 버튼이 눌리면 부들부들 떨며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가? 도킨스의 무신론은 그 자체가 거대한 감정적 반응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그것은 다른 무신론자들도 그를 비판하게 만드는 기제가 되었다. 상대방의 관점에 대한 배려 없이 "내가 틀린 말했냐"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일리있는 말 한 마디, 진리의 한 조각을 내세우며 위세하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기독신학에서 이는 스스로를 지옥으로 보내는 첫 걸음이다. 티모시 켈러는 C.S. 루이스의 저서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온 지옥도를 이렇게 설명한다:</div>
<blockquote class="tr_bq">
지옥은 괴로운 곳이며, C.S. 루이스는 이 괴로움의 원천을 설명한다. 인간의 교만, 근거 없는 피해망상, 자기 연민이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어! 다 멍청이들이야!라고 확신에 차서 외친다. 그들의 인간성은 완전히 사라지며, 사리분별력 또한 사라져버린다. 자기중심성이란 감옥에 최종적으로, 완전히 갇혀버린 것이다. 그들의 교만은 서서히 점점 더 거대한 버섯구름을 형성하며 확장한다. 그들은 계속하여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탓하며 산산히 조각난다. 이것이 지옥이다.</blockquote>
<div style="text-align: justify;">
(<a href="https://www.facebook.com/quotetime2007/posts/554275344627235">원문</a>)</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자신에게 주어진 명민함을 바탕으로 남보다 좀 더 큰 진리의 조각을 들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진리의 조각이 남들 것에 비해 얼마나 더 큰지나 자랑하고 다닌다면 그 진리의 파편은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그 파편 앞에서 자신이 작아질 뿐이며, 결국 자기 눈에만 커보이는 진리의 파편 안에 함몰될 뿐이다. 그 주화입마의 상태가 기독교의 지옥이다. [1]</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일리있는 말을 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지적능력만 갖춘 이라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일층 어려운 것은 <b>사랑으로</b> 일리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이는 다른 이들이 들고 있는 진리의 파편들 또한 모으게 되어, 최종적 진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된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싸가지 있는 진보'가 요즘 화두이다. 그러한 화두를 던진 강준만 본인의 역사를 생각하면 실소가 나올 수도 있고, 그 화두에 대한 진중권의 비판 또한 일리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실명비판을 해야한다'며 기세등등하게 덤비던 논객이 (당시 한국사회에서 실명비판이 필요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시련을 겪은 다음에야 '싸가지 있는 진보'론을 들고 나온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반증이 아닌가 싶다.</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br /></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주석-</div>
<div style="text-align: justify;">
[1] C.S. 루이스와 티모시 켈러의 지옥론에 대한 기독신학적 반론은 Iain Campbell의 Engaging with Keller를 참조.</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53785567940103112242014-08-30T19:23:00.001-07:002014-09-05T16:12:29.249-07:002014년 8월 29일자 퇴고와 기교본진 블로그에 <a href="http://askakorean.blogspot.com/2014/08/divided-sports-loyalty.html">이민자들은 어떤 나라의 스포츠 팀을 응원해야 하는가</a>에 대해 썼다.<br />
<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I was alternately giving the play-by-play, singing the Cal fight song, and chanting and screaming incomprehensibly. In a bus full of tourists who couldn't care less.</b></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 두번째 문장은 주어와 동사가 없이 부사구 하나만 덜렁 떠있는 비문이다. 첫 문장에 등장한 내가 한 짓거리는 꽤 우습다. 그 짓을 사람이 가득 찬 버스 안에서 했다는 것은 더더욱 우습다. 개그 포인트를 향상시키려면 이런 식으로 비문을 무릅쓰고 일종의 원투 펀치를 날리는 것도 방법이다.</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When the Lakers make their once-a-year trip to Washington D.C., I always go--although the Wizards bilk fans like me by charging $200 for a crappy seat.</b></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 좋은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글쓰기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문장에서 bilk란 단어는 "바가지 씌우다"라는 뜻이며, 한국어의 "바가지 씌우다"에 담긴 억울한 감정이 똑같이 묻어나는 단어이다. 만약 여기에 예를 들어 overcharge 같은 단어를 썼다면, 분명 문어적 뜻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달되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Overcharge는 주로 공문서에 등장하는 단어이다.)</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 대쉬(--)는 문장의 리듬감을 조절하는 데에 아주 유용하다. "go" 다음에는 대쉬 대신 쉼표를 넣어도 적절했을 것이나, I always go 같이 짧은 구절에 앞뒤로 쉼표를 넣으면 문장이 늘어지는 느낌이다. 숨 돌릴 기회를 주면서도 다음 내용으로 재빨리 움직이기 위해 대쉬를 넣었다. 하지만 나는 대쉬를 지나치게 남용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조심하는 부분이다.</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This is not going to be a flip dismissal about the importance of sports loyalty, of the kind often given by people who do not understand the value of sports and dismiss it as grown-ups playing with a ball.</b></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 이런 문장에 "of the kind"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여 중문을 만들 수 있다면 그대는 영작 최고봉에 거의 다 온 셈이다. "of the kind" 같은 접속사 없이 같은 내용을 전달하려면 내용이 겹치는 문장 두세 개가 등장할 것이나, 적절한 접속사로 간명한 문장 하나로 연결해낼 수 있다.</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Each match is a work of art, reflective of the nuanced highs and lows of the life itself. </b></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 "art"와 "reflective" 사이에는 "which is"가 빠져있다. 이런 식으로 긴 형용사구를 명사 뒤에 놓아 수식하는 모양새는 아주 자주 쓸 수 있는 고급형태이므로, 꼭 숙지하기 바란다.</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It is one thing to deeply engage in a metaphor, quite another to allow it to consume reality. </b></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 It is one thing to deeply engage in a metaphor, quite another to let it consume reality.</b></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 문법적 요소도 단어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이 문맥에서 allow와 let은 뜻이 같으나, let은 사역동사이기 때문에 뒤에 동사원형 (consume)을 직접 가져올 수 있다. 즉 allow를 let으로 바꿈으로서 문장에서 to라는 단어를 뺄 수 있는 것이다. 단어를 가장 적게 쓰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부 전달하는 것이 간명한 글쓰기의 기본이다.</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But if we should treat our sports opponents as enemies on the battlefield, there is no reason why we should not call for more bean balls to the head, more chop blocks designed to break the knee. </b></span><br />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br /></span>
<span style="background-color: white; color: #333333; font-family: Georgia, Times, 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64000701904297px; text-align: justify;">- "more . . ., more . . ."로 시작하는 동격구에 주목. 동격구를 잘 활용하면 and나 or 같은 접속사 없이도 리듬감있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span>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24676892527263923892014-08-24T20:42:00.000-07:002014-08-24T21:56:06.516-07:002014년 8월 24일자 퇴고와 기교주로 영어로 글을 쓰다보니 영어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언젠가 영어공부에 대한 개인적 소회를 풀어놓으려 한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예시를 위해 내가 본진 블로그에 글을 쓰고 퇴고하면서 내가 초본에 썼던 내용을 교정하거나, 무언가 작가로서의 기교를 발휘한 부분을 몇 군데 소개하려 한다. 가능하면 본진 블로그에 글을 하나 쓸 때마다 이런 포스트를 병행할 예정이다.<br />
<div>
<br />
<a href="http://askakorean.blogspot.com/2014/08/50-most-influential-k-pop-artists-10.html">오늘자 포스트</a>에는 드렁큰 타이거에 관한 내용을 썼다.<br />
<br />
<b>Korean hip hop can be considered a forest, with many a skilled hand that planted, tended and lovingly nurtured each tree. </b><br />
<br />
- "many a [단수형]"은 문어적 표현으로, "정말 많다"는 느낌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br />
- "planted, tended and lovingly nurtured"은 선호하는 형태. [동사]+[동사]+[동사]는 갑갑해지기 쉬우므로, 마지막 동사 앞에 부사를 넣어 [동사]+[동사]+[부사]+[동사]의 형태로 리듬의 변화를 준다.<br />
<br />
<b>The hip hop-esque music from the transitional period of 1990s is sometimes referred to as "rap dance," a genre that is still alive and well in Korea. </b><br />
<br />
- "rap dance" 다음에는 "which is"가 빠져있다. 동격구를 사용함으로서 단어 두 개를 없앨 수 있다면 그 길을 취하는 것이 좋다.<br />
<br />
<b>But they did grow a forest from what seemed to be a hostile, infertile land --> But they did raise a forest from what seemed to be a hostile, infertile land</b></div>
<div>
<br />
- "키워냈다"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처음에는 "grow"라는 동사를 썼으나, "raise"로 바꿨다. 진짜 숲이나 식물을 키워냈다는 함의를 전달하려면 grow가 옳으나, 아이를 키워내는 듯한 과정의 비유라는 생각 때문에 raise가 더 효과적이라고 느꼈다.<br />
- "hostile, infertile land": "very" 같은 의미 없는 강조어를 피하는 것은 영작의 기본 규칙 중 하나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렇게 유의어를 두어번 반복하는 식으로 한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3602451056657073242014-08-13T19:34:00.000-07:002014-08-13T19:49:35.005-07:00한국 관련 믿을 만한 외신외신이 한국에 대해 무슨 말을 하나 관심들이 많다. 국제적으로 한국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관심 갖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미국은 이걸 너무 안 해서 문제다.) 하지만 외신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문제다. 국제사회가 보고 있다는 중압감을 (상대편에) 발휘하고 싶고, 한국의 언론은 믿을 수 없다는 의식도 있기 때문에, "외신이 이랬더랜다"라는 전가의 보도가 휘둘려 지는 모습이 아주, 아주 자주 보인다.<br />
<div>
<br /></div>
<div>
외국 사는 입장에서 볼 때, 그 전가의 보도는 종종 우스꽝스러운 썩은 지푸라기다. 아무래도 한국에 사는 경우 어떤 외신은 공신력이 있고 어떤 외신은 "찌라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가 크다. 게다가 이름난 외신이라 하여 한국에 대해 잘 안다는 보장도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임 (Time Magazine; 런던의 "타임즈"가 아니다) 이나 BBC가 한국에 대해 보도하는 모습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인상비평에 불과한 외신 기사를 들고 "세계 여론이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며 목청 높이는 것은 보기 민망할 정도다.</div>
<div>
<br /></div>
<div>
거의 대부분의 외신은 한국에 지국이나 상주 특파원이 없고, 홍콩이나 일본에 위치한 "아시아 특파원"이 한국 뉴스까지 커버한다. 이러한 "아시아 특파원"들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도 없고 한국에 별다른 인적 네트워크도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나오는 영자지와 한국에 대하여 쓰는 영어 블로그에 기반하여 기사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블로그 AAK!의 내용이 약간만 바뀌어 기사화된 경우도 많다. 링크라도 걸어주면 양반이다.)</div>
<div>
<br /></div>
<div>
때문에 대부분의 외신은 한국에 상주하는 프리랜서 기자들에게 많이 의존한다. 한국에서 뉴스거리가 나오면 급히 프리랜서 기자들에게 연락해서 기사를 만들어 내어 싣는 형식이다. 문제는 외신 편집부는 대부분 한국에 대해 상당히 기본적인 배경도 없기 때문에 좋은 기사, 기고를 부실한 기사, 기고와 구분할 역량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이를테면 프리랜서가 CNN의 명패를 달고 기사를 내었다 하여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CNN 수준의 기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div>
<div>
<br /></div>
<div>
도저히 기자 단위로 찾아읽을 여력이 없다면, 뉴욕 타임즈, 월 스트리트 저널,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 타임즈를 추천한다. 이 네 군데 신문/잡지는 한국에 상주하는 특파원이나 한국 지국이 있고, 때문에 한국에 대한 기사의 질이 다른 외신에 비해 월등히 높다. 다루는 정보나 논평의 깊이가 한국 국내 언론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한국 관련 뉴스만 다루는 블로그를 개설한 WSJ의 최근 약진은 주목할 만하다. </div>
<div>
<br /></div>
<div>
하지만 앞서 언급한 외신의 한계 때문에, 한국 관련 외신 뉴스는 기자 단위로 신뢰도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 개인적으로 한국 관련 뉴스에 대해 내가 가장 신뢰하는 기자들과 그들의 소속은 다음과 같다:</div>
<div>
<br /></div>
<div>
- Choe Sang-hun [최상훈]: 뉴욕 타임즈 한국 특파원</div>
<div>
- Alastair Gale: WSJ 한국 지국장</div>
<div>
- 그 외 WSJ의 Korea Real Time 블로그 소속 정규 기자 전원. (외부 기고인들은 제외.)</div>
<div>
- Simon Mundy: 파이낸셜 타임즈 한국 특파원</div>
<div>
- Geoffrey Cain: 프리랜서. 주로 Global Post에 가장 자주 등장.</div>
<div>
- James Pearson: 로이터 한국 특파원</div>
<div>
<br /></div>
<div>
그 외 더 있으나 지금 당장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날 때마다 때때로 목록에 추가하겠다. 이코노미스트는 원칙적으로 개인 기자 이름을 기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참조 바란다.</div>
<div>
<br /></div>
<div>
첨언 1 - 1980-90년대의 기억이 남아서인지, 타임紙를 정론지로 여기고 많은 신뢰를 부여하는 경우가 잦다. 유통기한이 지난 인식이다. 타임은 아시아를 커버할 능력을 잃은 지 오래며, 다른 뉴스에서도 미국 여론을 선도할 역량을 잃은 지 최소한 10년은 지났다. 여론선도력이 뛰어난 미국 언론사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트에서 설명하겠다.</div>
<div>
<br /></div>
<div>
첨언 2 - 한국에서 "외신이 이렇게 보도했다"며 강한 정치적 주장이 뒤따르는 경우, 가급적 원문을 읽어볼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억지스런 번역 혹은 노골적인 오역으로 아전인수격 주장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으며, 심지어 대형 언론사도 종종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듯하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36348039055938331842014-08-10T12:59:00.000-07:002014-08-10T13:00:14.024-07:00찜찜한 그녀<div style="text-align: center;">
<b>::스포주의::</b></div>
<br />
주변에서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Her"에 열광하는 반응이 여럿 보인다. 하지만 내가 Her를 보았을 때는, 잘 만든 수작이나 왠지 찜찜하다는 감상이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좀 시간이 걸렸다.<br />
<br />
왜 찜찜했는가. 아마도, 티어도어와 사만타의 관계가 어딘가 비정상적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으나, 티어도어와 사만타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하기엔 뭔가가 조금 뒤틀려있다. 언제나 보던 낯익은 광경이 어딘가 살짝 바뀌어 있을 때 알게모르게 느껴지는 껄적지근함. 이게 나의 감상이 아니었나 싶다.<br />
<br />
무엇이 빠져있는가, 티어도어와 사만타의 관계에선? 사만타에 대한 "호기심"이 빠져있지 않은가 한다. 사랑은 하면 할 수록 상대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Her는 오직 티어도어의 감정에만 집중한다. "실제"로는 티어도어가 사만타와 대화하며 사만타에게 오만 질문을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영화에선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br />
<br />
사랑한다면,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아내는 음악가다. 아내와 만나기 전 음악의 세계는 나에게 낯선 것이었다. 우리가 만나 오래 교제할 수록 나는 아내와 음악과의 관계에 대해 더욱 더 많은 질문을 했다. 어떤 음악이 좋은가. 왜 좋은가. 그 음악을 연주할 때는 어떤 느낌이 드는가.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사랑할 수록 사랑하는 이의 자아를 형성하는 큰 부분에 대해 더 궁금해졌으며, 답을 깊이 알게될 수록 더 깊이 사랑했다.<br />
<br />
사만타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이 "여성"과 관계를 맺는 티어도어는, 왜 더 사만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것인가? 티어도어가 사만타에게 그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나라도 던졌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오직 사만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사만타의 사랑이 인간이 일반적으로 하는 사랑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티어도어가 알아버린 순간, 그와 사만타의 관계는 무너져버린다.<br />
<br />
사랑의 대상에 호기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 대상을 독립된 인격체로 취급하는 첫 걸음이다. 그 대상이 나를 향한 마음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만의 취향, 특성, 세계관 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더 알고자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누군가를 완전히 사랑하기 위한 선결과제이기 때문이다.<br />
<br />
티어도어는 사만타를 사랑했는가? 본인은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나,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그렇다라고 선뜻 말하기 힘들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몇천명에게 동시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닌가. 티어도어가 이 사실에 무너져 내렸다는 것은, 독립된 개체로서의 사만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서의 사만타에 대한 별다른 고찰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티어도어에게 사만타는 인격체가 아니었던 것이다.<br />
<br />
영화가 끝나며, "그녀"라는 영화제목을 떠올리면서 찝찝함은 배가된다. "Him"--그 남자, 그 녀석, 그 "사람"--이었다면 같은 수준의 영화가 나타났을까? 사만타는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을 뿐, 기실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하지만 티어도어는 별다른 고찰 없이 사만타를 여성이라고 간주하며, 인격체가 아닌 그의 감정적 욕구에 반응하는 객체로만 간주한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컴퓨터 프로그램이 "사무엘" 같은 이름을 사용하며 굵고 깊은 목소리로 대화했을 경우에도 티어도어는 그렇게 쉽게 객체화할 수 있었을까? 그런 객체화에 관객들은 같은 수준으로 열광했을까? 생각해볼 일이다.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66040429241008713872014-08-08T15:11:00.002-07:002014-08-08T15:21:39.976-07:00Engaging with Keller - Iain Campbell & William Schwitzer (2013)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a href="http://www.amazon.com/Engaging-Keller-Thinking-Influential-Evangelical/dp/0852349289/ref=sr_1_1?ie=UTF8&qid=1407534824&sr=8-1&keywords=engaging+with+keller">http://www.amazon.com/Engaging-Keller-Thinking-Influential-Evangelical/dp/0852349289/ref=sr_1_1?ie=UTF8&qid=1407534824&sr=8-1&keywords=engaging+with+keller</a> 티모시 켈러 목사의 신학을 여러 신학자가 비평하는 책이다.<br />
<br />
나는 30세가 되어서야 기독교에 입교했다. 나를 입교시킨 가장 큰 영향은 뉴욕 리디머 (Redeemer) 교회의 티모시 켈러 (Timothy Keller) 목사였다. 켈러 목사는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젊은층에게 호소력있는 설교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점차 신앙을 잃어버리는 현대사회의 총아인 대도시에서 설득력을 구현했기 때문에, 켈러의 신학은 미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내 개인적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겐 언제나 켈러의 저서를 권유하곤 한다.<br />
<br />
때문에 반대의견을 듣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무결한 신의 뜻을 불완전한 인간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는 그 어떤 신학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렇게 지적으로, 예의를 갖추며 신학의 차이점을 논의하는 책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br />
<br />
한나절 짬짬히 읽었을 뿐이지만 벌써 60페이지를 넘겼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좋은 가독성이다.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53520360538277122652014-08-08T14:23:00.001-07:002014-08-08T15:38:31.606-07:00Euny Hong - Birth of Korean Cool (2014)아마존닷컴에서 2014년 8월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a href="http://www.amazon.com/The-Birth-Korean-Cool-Conquering/dp/1250045118">http://www.amazon.com/The-Birth-Korean-Cool-Conquering/dp/1250045118</a><br />
<br />
P. 48에 내 얘기가 나온다. 책을 사서 본 친구가 내가 나왔다고 반가워하며 보내준 사진이다.<br />
<br />
<div class="separator" style="clear: both; text-align: center;">
<a href="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jvHX11ac3ivUMxASqQywY9yanYzZxF_ydW37xecfYChOvcKL-L3Uz7ig9eqpYV_xhqgVbPthameXLN3WLa0-0GNJTKZgp9b4swkuoNUaj7O99jiDoMiyEbkKzSb4KmGXlw3u_CHq5y00OU/s1600/2014-08-07_21-40-52_298.jpg" imageanchor="1" style="margin-left: 1em; margin-right: 1em;"><img border="0" src="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jvHX11ac3ivUMxASqQywY9yanYzZxF_ydW37xecfYChOvcKL-L3Uz7ig9eqpYV_xhqgVbPthameXLN3WLa0-0GNJTKZgp9b4swkuoNUaj7O99jiDoMiyEbkKzSb4KmGXlw3u_CHq5y00OU/s1600/2014-08-07_21-40-52_298.jpg" height="640" width="360" /></a></div>
<br />
사서 봐야하나.<br />
<br />
-첨- 내 글을 좋게 봐준 내용에는 감사하나, 저 문장은 아주 거슬린다:<br />
"My favorite anonymous Korean American author of the blog "Ask a Korean" puts it best".<br />
이런 식으로 썼어야했다:<br />
"The Korean American author of "Ask a Korean," my favorite blog, puts it best".<br />
첫 문장에선 "favorite"이란 단어가 수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익명의 한국계 미국인 AAK 블로그 작가가..."이나, "익명의 한국계 미국인 AAK 블로그 작가"는 이 세상에 한 명 뿐이므로 "가장 좋아하는"이란 수식은 어색하다. 문장의 숨도 너무 길다.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91045289202760526032014-08-08T14:03:00.000-07:002014-08-08T15:27:22.512-07:00왜 이리 절망하는가"이게 나라인가."<br />
<br />
세월호 사건 이후 지금까지 자주 보이는 한탄이다. <a href="http://hankookilbo.com/v/5150a6e5803e4000aefb84d9a81aa394">오늘 읽은 신문 칼럼</a>에도 이 표현이 보인다: "과연 이게 나라인가. 어이없고 기초도 기본도 무시된 유병언 수사, 반성도 개선도 없는 국회, 그리고 여전히 부정과 비리에 둔감한 사람들."<br />
<div>
<br /></div>
<div>
조금 의아하다. 세월호 사건은 물론 비통하다. 윤 일병 구타살인, 임 병장 총기난사 사건 또한 공분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 비통함과 공분이 왜 "이게 나라인가"라는 한탄으로 표출되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div>
<div>
<br /></div>
<div>
세월호 사건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대형사고는 아니다. 1995년, 삼풍백화점이 끔찍하다 못해 우스울 정도로 붕괴되었던 모습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의 사망자는 500명이 넘었다. 당시에 떠돌던, 잔해의 묻혀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참동안 들렸다가 하나씩하나씩 사그라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세월호 안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는 것만큼이나 안타깝고 속을 태운다. 그 큰 고급백화점 건물이 붕괴까지 이르게한 구태와 무능은 세월호 사건을 일어나게한 구태와 무능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다.</div>
<div>
<br /></div>
<div>
그 약간 전에는 성수대교 붕괴가 있었고, 같은 해에는 100명이 넘게 사망한 대구 상안동 가스폭발 사건이 있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에서는 200명 넘게 사망, 실종했다. 구태와 무능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월호와 비슷한 규모의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엔 국가의 기본적 기능을 의심하는 반응이 지금처럼 성행하진 않았다. </div>
<div>
<br /></div>
<div>
작금의 한탄은 끔찍한 사건 직후에 나올 수도 있는 감정적인 반응이라 보기도 어렵다. 세월호 사건 직후 <a href="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6940.html">한겨레가 대문짝만하게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표제를 단 주간지</a>를 내놓았을 때, 살짝 과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워낙 충격적인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지 100일이 가까워가는 지금까지도 "이게 나라인가"라고 자문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이 다른 거대 사고와 무엇이 다르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왜 슬픔을 넘어선 절망을 고집하는지, 이렇게 절망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다.</div>
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tag:blogger.com,1999:blog-4015495719474464830.post-45721222736764010322014-08-08T12:45:00.002-07:002014-08-08T12:54:11.237-07:00개장이렇게 다시 저질러 버렸다. 본 블로그에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쓰는 것도 버거워하고, 두번째 블로그는 있는 듯 없는 듯 내박쳐놓은 상황에서, 염치도 없이 세번째 블로그를 개장한다. 이쯤 되면 읽지 않은 책과 보지 않은 DVR 녹화된 TV 프로그램과 쓰지 않은 블로그들을 모아놓고 원혼제라도 지내야 꿈자리가 성할 것 같다.<br />
<br />
본디 계획은 본 블로그에 두 개의 SNS, 즉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연계하여 본 블로그에는 담기 어색한 자투리 생각들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페이스북은 영어, 트위터는 한글로 하여, 두 문화권을 아우르는 정보수집 기능을 겸했다.<br />
<br />
그러나 오호 통재라, 자투리 생각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본인의 잉여력을 먹고 무한증식하여 140자에 담기엔 버거워졌다. (말이 너무 많아서 무한의 공간인 인터넷도 모자라다니, 난 여러모로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숙고 없이 SNS에 내뱉어 버리는 글은 나의 한국어 실력을 좀먹었다. 연습할 공간이 필요했다.<br />
<br />
주로 트위터에 길게 써냈던 생각들을 좀 더 정제하여 담아내는 공간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가끔은 영어로 된 글도 등장할 것이다. 정기적 업데이트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T.K. (Ask a Korean!)http://www.blogger.com/profile/07663422474464557214noreply@blogg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