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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December 20, 2015

종교와 시민사회: 미국 모델 대 프랑스 모델

여러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혼재하는 공동체의 경우, 종교와 시민사회는 어떤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크게 미국 모델과 프랑스 모델이 있다고 생각하며, 두 모델의 차이는 종교와 시민사회 중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있다.

(모든 모델이 그러하듯이 아래 모델들은 몇 단계의 추상화를 거쳐 나온 결과이며, 현실은 모델과 방향성은 같으나 일치하진 않는다.)

미국 모델은 위와 같다. 여러 종교 (작은 원)들이 중앙에 모여 시민사회를 형성한다. 일종의 종교 공화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여러 개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세워진 나라이다. ("다 기독교 아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18세기 유럽인들의 관점에선 퀘어커교와 영국 국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감이 있다.) 심지어 몇몇 주는 *오직* 종교의 자유만을 위해 세워진 것을 감안하면 (이를테면 펜실베니아는 퀘이커교도들이 설립한 주), 위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역사적 결과물이다.

반면 프랑스 모델은 아래와 같다.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기존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천주교에 대한 의식적 저항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종교의 영향을 거부한 세속적 사상 (laicite)에 기반하여 작동한다. 이 형태 또한 프랑스의 역사적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이 두 모델의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 미국의 시민사회는 중심이 비어있다. 다양한 종교의 공약수로 형성된 시민사회이기 때문에, 미국의 시민사회는 자체적인 동력이 없다. 그러므로 미국의 시민사회는 흰색으로 처리했다.
  • 프랑스의 시민사회의 중심은 세속주의며, 이것은 자체적인 동력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독자적 색깔이 있다.

  • 궁극적으로 보면 미국에선 무신론자는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필수적인 공약수 중 하나 (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 궁극적으로 보면 프랑스에선 종교인은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시민사회의 중심동력인 세속주의와 배치되기 때문이다.

  • 미국의 시민사회는 수축의 압력을 받는다. (화살표 방향 참조) 공약수의 크기에는 최대 한계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의 공공영역은 제한되어 있으며, 공공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계약과 거래의 양상을 띤다.
  •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팽창의 압력을 받는다. 만인의 이성적 사고의 기반한(다고 생각하는) 세속주의에는 스스로의 범위를 제한하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의 프랑스의 공공영역은 미국의 공공영역보다 비대하며 (도면의 크기 참조), 공공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하나의 이상을 향한 자기 혁신의 양상을 띤다.

  • 미국은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공약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종교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유대인 여성은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는 경우 유대교가 인정하는 이혼을 할 수 없지만, 미국 법원은 이에 개입하지 않는다. 
  • 프랑스는 종교의 사회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시민사회 자체의 동력으로 대체한다. 특정 종교가 시민사회 자체의 동력과 크게 유사한 경우 (이를테면 천주교)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대체 과정은 매우 지난하다.

  • 미국은 새로운 종교를 흡수하기 쉽다. 최소의 공약수만 받아들이면 바로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무슬림은 유럽의 무슬림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주류사회에 동화된다. 타종교에 대한 차별과 적대는 공약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선에서만 이루어진다.
  • 프랑스는 새로운 종교를 흡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종교의 사회적 부분을 시민사회에 완전히 내놓은 다음에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새로 진입하는 종교에게 이는 지나치게 값비싼 거래이다. 프랑스 시민사회 형성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종교 (=천주교) 정도만이 이러한 거래를 할 역량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든 새로운 종교는 차별과 적대를 받는다.

Monday, May 25, 2015

기독교의 핵심

사람들이 모두 다른만큼, 신앙에 다다르는 길이 전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 존 칼뱅, C.S. 루이스와 티모시 켈러의 글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 신학자들이 설파한 기독교의 핵심에 크게 공감하여 신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티모시 켈러의 이 설교를 제 언어로 해석한 것입니다. 내용은 많이 비슷하지만 번역은 아닙니다. 신앙을 첫 접하는 사람들,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십계명이 무엇인지, 그 중 제1계명이 무엇인지는 다들 아실겁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이건 대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 "우상"이 진정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십계명에 등장하는 "우상"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아주 어려운,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해야 합니다. 즉: 당신은 왜 삽니까? 이렇게 자살하기 쉬운 세상에서, 왜 꾸역꾸역 아침에 일어나 밥을 입에 밀어넣고 그닥 가고 싶지도 않은 학교나 직장에 나갑니까? 내일은 뭐가 달라지길래 오늘을 사나요? 

이런 질문이 어렵다면, 반대로 접근해도 됩니다: 당신의 최악의 악몽은 뭔가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살할 것 같은가요? 직장에서 해고 당하면? 돈이 다 없어지면? 가족이 전부 죽으면? 사고를 당해서 얼굴이 흉칙하게 망가지면? 

여기서 나오는 대답이 당신 삶의 의미이고, 당신의 존재를 떠받치는 당신의 신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우리 주변에선, 직장과 커리어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커리어에 모든 것을 던집니다. 가족과의 화목도, 자신의 건강도 안중에 없고, 그저 일에 목숨을 겁니다. 오지의 원주민이 화산의 신에다 처녀를 공양하듯, 이들은 "커리어"라는 우상에다가 자신의 가족과 건강을 팔아넘깁니다. 

"자녀"라는 우상도 흔합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부모들은 자녀에 모든 것을 겁니다. 그렇게 과도한 기대에 엇나가버리는 자녀들의 모습 또한 흔합니다. "자녀"를 우상으로 삼은 부모는, 잘못돼버린 자녀를 보는 순간 온세상이 무너져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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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29, 2015

T 형제에게 보내는 서신

신앙의 형제 T님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3)

제게 이메일로 신앙 상담을 하시려 연락을 주셨는데, 이렇게 좀 더 공개적인 형태로 답변을 드려서 송구합니다. 그러나 T님의 고민은 T님 혼자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저희 신앙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큰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에, T님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에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 공간을 빌었습니다.

T님은 동성애자시라고 말씀 주셨습니다. 비록 T님이 다니시는 교회에선 적극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회를 하거나 달리 탄압을 하진 않지만, 동성애는 창조원리에 위배되는 죄악이며 정신병이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의 성지향성을 포기할 수 없기에, 신앙생활에서 마음에 큰 짐을 짊어지게 되실 것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고민을 저를 믿고 털어놓아 주셔서 과분함을 느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조금이라도 T 형제님의 짐을 덜고자 노력하려 합니다.

1.

먼저 상기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가 동성애를 대하는 시각은 하나가 아니며, 동성애 이슈가 대두된 것이 최근이니만큼, 그 이슈에 대한 신학적 반응 또한 확정된 것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란 점입니다. 성공회의 대부분은 동성애를 긍정하며, 각 수백만 명의 신도를 지닌 미국 최대의 루터교 종파와 장로교 종파 또한 동성애를 긍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종파가 동성애에 대한 재해석을 거칠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물론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쉽지 않다"라는 말은 양방향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쉽게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신앙의 형제들에게 얼마나 큰 괴로움을 끼치는지, 그것이 진정 주님의 사랑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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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25, 2015

"교회의 으뜸가는 죄"

[이 연작 트윗의 주요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미국 교회의 으뜸가는 죄는 그 교회의 울타리 바깥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번영하는 목회와 그렇지 않은 목회의 가장 기본적 차이는 바로 이 능력, 즉 이 테이블에 앉아있지 않은 이들은 누구인가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이 사람들을 상상할 능력이 없이는, 즉 신이 바라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인지할 능력 없이는 지속적, 효과적, 신앙적으로 이 테이블을 계속 확장할 수가 없다. 이것이 죄인 이유는, 교회가 자라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회를 필요로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게되기 때문이다.

Friday, September 5, 2014

사랑 속에서 진리를 말하라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 에베소서 4장 15절 (현대인의 성경)

요즘 가장 가슴 속에 남는 성경 구절이다. 한 단어 한 단어 곱씹게 된다. 그냥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

기독신학에서 신은 온전한 진리 그 자체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최소한 진리의 일부는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뜻을 전부 알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또한 모든 진리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하는 비유는 실제로 인간이 맞닥뜨리는 한계에 비하면 지나치게 스케일이 작은 비유가 아닐까 싶다. 신과 모든 진리를 마주하는 인간은, 냄새를 맡지 못 하는 개미가 항공모함 안에서 그 배의 크기와 모양을 가늠하려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진리의 한 조각 정도는 가지고 있다. ("진리의 한 조각"은 "일리"가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혹자는 자기가 지닌 진리의 파편을 높이 들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여긴다. 리처드 도킨스의 최근 글에 그러한 태도가 잘 드러난다. 아무리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라도 감정을 배제하기만 한다면 이성이 전부 해결해 줄 것이란 논지. 지난 150년간 주류 논리가 되어버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그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그러한 "이성"을 숭배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감정적 버튼을 훤히 만천하에 드러내고 다니며, 그 버튼이 눌리면 부들부들 떨며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가? 도킨스의 무신론은 그 자체가 거대한 감정적 반응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그것은 다른 무신론자들도 그를 비판하게 만드는 기제가 되었다. 상대방의 관점에 대한 배려 없이 "내가 틀린 말했냐"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리있는 말 한 마디, 진리의 한 조각을 내세우며 위세하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기독신학에서 이는 스스로를 지옥으로 보내는 첫 걸음이다. 티모시 켈러는 C.S. 루이스의 저서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온 지옥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옥은 괴로운 곳이며, C.S. 루이스는 이 괴로움의 원천을 설명한다. 인간의 교만, 근거 없는 피해망상, 자기 연민이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어! 다 멍청이들이야!라고 확신에 차서 외친다. 그들의 인간성은 완전히 사라지며, 사리분별력 또한 사라져버린다. 자기중심성이란 감옥에 최종적으로, 완전히 갇혀버린 것이다. 그들의 교만은 서서히 점점 더 거대한 버섯구름을 형성하며 확장한다. 그들은 계속하여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탓하며 산산히 조각난다. 이것이 지옥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민함을 바탕으로 남보다 좀 더 큰 진리의 조각을 들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진리의 조각이 남들 것에 비해 얼마나 더 큰지나 자랑하고 다닌다면 그 진리의 파편은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그 파편 앞에서 자신이 작아질 뿐이며, 결국 자기 눈에만 커보이는 진리의 파편 안에 함몰될 뿐이다. 그 주화입마의 상태가 기독교의 지옥이다. [1]

일리있는 말을 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지적능력만 갖춘 이라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일층 어려운 것은 사랑으로 일리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이는 다른 이들이 들고 있는 진리의 파편들 또한 모으게 되어, 최종적 진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된다.

'싸가지 있는 진보'가 요즘 화두이다. 그러한 화두를 던진 강준만 본인의 역사를 생각하면 실소가 나올 수도 있고, 그 화두에 대한 진중권의 비판 또한 일리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실명비판을 해야한다'며 기세등등하게 덤비던 논객이 (당시 한국사회에서 실명비판이 필요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시련을 겪은 다음에야 '싸가지 있는 진보'론을 들고 나온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반증이 아닌가 싶다.

-주석-
[1] C.S. 루이스와 티모시 켈러의 지옥론에 대한 기독신학적 반론은 Iain Campbell의 Engaging with Keller를 참조.

Friday, August 8, 2014

Engaging with Keller - Iain Campbell & William Schwitzer (2013)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http://www.amazon.com/Engaging-Keller-Thinking-Influential-Evangelical/dp/0852349289/ref=sr_1_1?ie=UTF8&qid=1407534824&sr=8-1&keywords=engaging+with+keller 티모시 켈러 목사의 신학을 여러 신학자가 비평하는 책이다.

나는 30세가 되어서야 기독교에 입교했다. 나를 입교시킨 가장 큰 영향은 뉴욕 리디머 (Redeemer) 교회의 티모시 켈러 (Timothy Keller) 목사였다. 켈러 목사는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젊은층에게 호소력있는 설교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점차 신앙을 잃어버리는 현대사회의 총아인 대도시에서 설득력을 구현했기 때문에, 켈러의 신학은 미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내 개인적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겐 언제나 켈러의 저서를 권유하곤 한다.

때문에 반대의견을 듣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무결한 신의 뜻을 불완전한 인간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는 그 어떤 신학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렇게 지적으로, 예의를 갖추며 신학의 차이점을 논의하는 책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

한나절 짬짬히 읽었을 뿐이지만 벌써 60페이지를 넘겼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좋은 가독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