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25, 2015

기독교의 핵심

사람들이 모두 다른만큼, 신앙에 다다르는 길이 전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 존 칼뱅, C.S. 루이스와 티모시 켈러의 글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 신학자들이 설파한 기독교의 핵심에 크게 공감하여 신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티모시 켈러의 이 설교를 제 언어로 해석한 것입니다. 내용은 많이 비슷하지만 번역은 아닙니다. 신앙을 첫 접하는 사람들,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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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십계명이 무엇인지, 그 중 제1계명이 무엇인지는 다들 아실겁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이건 대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 "우상"이 진정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십계명에 등장하는 "우상"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아주 어려운,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해야 합니다. 즉: 당신은 왜 삽니까? 이렇게 자살하기 쉬운 세상에서, 왜 꾸역꾸역 아침에 일어나 밥을 입에 밀어넣고 그닥 가고 싶지도 않은 학교나 직장에 나갑니까? 내일은 뭐가 달라지길래 오늘을 사나요? 

이런 질문이 어렵다면, 반대로 접근해도 됩니다: 당신의 최악의 악몽은 뭔가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살할 것 같은가요? 직장에서 해고 당하면? 돈이 다 없어지면? 가족이 전부 죽으면? 사고를 당해서 얼굴이 흉칙하게 망가지면? 

여기서 나오는 대답이 당신 삶의 의미이고, 당신의 존재를 떠받치는 당신의 신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우리 주변에선, 직장과 커리어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커리어에 모든 것을 던집니다. 가족과의 화목도, 자신의 건강도 안중에 없고, 그저 일에 목숨을 겁니다. 오지의 원주민이 화산의 신에다 처녀를 공양하듯, 이들은 "커리어"라는 우상에다가 자신의 가족과 건강을 팔아넘깁니다. 

"자녀"라는 우상도 흔합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부모들은 자녀에 모든 것을 겁니다. 그렇게 과도한 기대에 엇나가버리는 자녀들의 모습 또한 흔합니다. "자녀"를 우상으로 삼은 부모는, 잘못돼버린 자녀를 보는 순간 온세상이 무너져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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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정한 지옥도는 그 목표를 실제로 이루었을 때 펼쳐집니다. (여기서 "지옥"은 가볍게 쓰는 말이 아니라 문어적 표현입니다.) 어떤 이들은 정말로 자신들의 우상을 끝까지 쫓아가서 삶의 목표를 이뤄버립니다. 많은 돈을 벌기도 하고, 엄청난 명예를 얻기도 하고, 대단한 자녀를 정말로 키워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표를 성취해버린 순간 기쁨은 곧 사라집니다. 안 사라지는 기쁨은 없습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그런 희열을 맛보려 새로운 목표를 세워보지만, 그런 새로운 목표는 또 하나의 새로운 우상일 뿐입니다. 그 새로운 목표를 이루어도, 성취의 기쁨은 다시 한 번 사라집니다. 우상을 차지한 사람은 궁극의 공허함을 맛보거나,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갈증의 지옥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에 공허하고, 그 무엇을 이루어도 성취감이 계속되지 않기에 갈증에 불탑니다.

이건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무한히 존재하는 경우입니다.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자기 아들 자랑만 하는 어머니는, 그 아들이 우상이고 아들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 아들이 정말로 성공해버려서 어머니의 봉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 그 어머니는 종종 (흔히 '빈둥지 신드롬'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극도의 허무함 속에 빠져버립니다. 최고의 운동선수들은 정점에서 은퇴하더라도, 그 정점을 다시 찾을 수 없기에 평생 그 순간만을 되새기면서 삽니다. (마이클 조던이 은퇴 후 어떤 싸이코 짓을 하고 살았나 검색해보세요.) 

이런 예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영원히 거론할 수 있습니다. 왜 영원히 거론할 수 있느냐면, 이것이 영원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삶에 의미가 없으면 영적으로건 물질적으로건 죽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불완전한 피조물에 두게 되면, 그 삶은 자연히 불완전해집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삶은 무엇일까요? 대체 어디다 삶의 의미를 두어야, 이 갈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인간 본성에 대한 궁극의 질문이고, 기독교는 이 질문에 간명한 답을 제공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히 변치않는, 궁극적 삶의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않느냐면, 다른 모든 우상과는 달리 신은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합니다. "만들어낸 자"만이 완벽하고 완전한, 영원히 영혼을 적시는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여기서 모든 우상은 사실은 좋은 것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성공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족을 버리라고 가르치지도 않고, 물욕을 버리라고 가르치치도 않습니다. 그저 그 좋은 것들의 상대적 가치를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우상은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이든 그것을 삶의 중심에 가져다 놓으면, 그것이 당신의 우상입니다. 그 우상을 쫓으면 당신의 삶은 망가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 놓으면, 삶의 좋은 것들은 그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대중가요로 대부분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시인과 촌장 하덕규 씨의 신앙 고백입니다. <가시나무>의 가사는, 신이 아닌 다른 것을 삶의 중심에 놓았을 때 일어나는 영혼의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내 자아'가) 너무도 많아 "당신" (하나님)이 쉴 곳이 없다는 고백. 가장 궁극적인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바램, 내 안의 어둠,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이 내 삶의 중심에 있으면, 내 자아도 괴롭고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다른 사람을 도울 여력도 없습니다.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이것이 우상을 섬기는 삶의 모습입니다.

휘발유로 가는 자동차에 알코올을 넣어도 차는 어느정도까진 굴러갑니다. 우상을 영혼의 중심에 놓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상을 희구해도 인생은 불완전하게나마 살아집니다. 하지만 완벽한 삶, 영혼이 만족되는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희구하여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삶의 중심인 사람은 돈을 아무리 벌어도 그 돈에 눈멀지 않고, 자녀를 사랑하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일하지만 직장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이건 그 사람의 마음이 각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피조물이란 본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믿는 핵심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