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anuary 29, 2015

T 형제에게 보내는 서신

신앙의 형제 T님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3)

제게 이메일로 신앙 상담을 하시려 연락을 주셨는데, 이렇게 좀 더 공개적인 형태로 답변을 드려서 송구합니다. 그러나 T님의 고민은 T님 혼자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저희 신앙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큰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에, T님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에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 공간을 빌었습니다.

T님은 동성애자시라고 말씀 주셨습니다. 비록 T님이 다니시는 교회에선 적극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회를 하거나 달리 탄압을 하진 않지만, 동성애는 창조원리에 위배되는 죄악이며 정신병이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의 성지향성을 포기할 수 없기에, 신앙생활에서 마음에 큰 짐을 짊어지게 되실 것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고민을 저를 믿고 털어놓아 주셔서 과분함을 느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조금이라도 T 형제님의 짐을 덜고자 노력하려 합니다.

1.

먼저 상기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가 동성애를 대하는 시각은 하나가 아니며, 동성애 이슈가 대두된 것이 최근이니만큼, 그 이슈에 대한 신학적 반응 또한 확정된 것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란 점입니다. 성공회의 대부분은 동성애를 긍정하며, 각 수백만 명의 신도를 지닌 미국 최대의 루터교 종파와 장로교 종파 또한 동성애를 긍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종파가 동성애에 대한 재해석을 거칠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물론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쉽지 않다"라는 말은 양방향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쉽게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신앙의 형제들에게 얼마나 큰 괴로움을 끼치는지, 그것이 진정 주님의 사랑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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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 

동성애를 긍정하는 신학의 개론은 Matthew Vines의 God and the Gay Christian에 쉽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일단 이 책부터 읽어보시길 권유합니다.

바인즈의 가장 중요한 논점은, 현대에 대두된 성지향성이란 이슈는 성경에 직접적인 해설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란 것입니다. '레위기나 고린도서, 로마서에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비슷한 시기의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동성을 향한 음욕에 가까우며, 현대의 성지향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대사회에 동성애적 행위는 있었을지 모르나, 성지향성 같은 개념은 없었습니다. 즉 동성 간에 성행위는 있었지만, 이성 관계를 완전히, 100 퍼센트 대체하는 동성을 향한 성지향성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성경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고기를 먹는 사람이 가끔 야채를 먹는 행위라면, 현대식 성지향성의 개념은 특정 인간은 완전히 초식동물이며 고기를 소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발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식 성지향성이란 개념이 완전히 새로운 발견이라고 하여, 만물을 창조한 주님의 섭리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레위기나 로마서, 고린도서에 등장하는 동성애와는 분리될 수 있고, 만인은 주님의 사랑 앞에서 동등하다는 우리 신앙의 대원칙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것이 바인즈의 주장입니다. 동성애를 긍정하는 종파들의 신학적 해석은 대체로 이 궤를 따릅니다.

1.B.

모든 신학적 주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바인즈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궁극적으론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틀리더라도, 주님의 은혜라는 궁극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전인수적 성경 해석은 신자로서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이 해석이 사실 전혀 아전인수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율법의 특징은 세속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스러움과 도덕적 삶을 강조하는 기독교 율법은 세속적 관습보다는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율법은 종교 지도자들이 꼬장꼬장하게 자잘한 계율까지 다 지키라고 시키는 것 또한 거부합니다. 우리는 유대교인과는 달리 레위기의 오만 자잘한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예수는 율법을 무시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했다는 죄목 하에 살해당했다는 점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도덕이 현재는 보수적이라고 여겨지고 있지만, 바울의 시대에 부부 간의 성행위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쾌락을 긍정하는 것 또한 당시에는 혁명적일 정도로 진보적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바인즈의 주장은 보수적 종교의 입장과는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세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게이 활동가들의 입장들과도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 게이 활동가들의 대부분은 자유주의적 (리버테리언) 성향을 띱니다. 즉 서로 동의하는 성인끼리라면 동성 성행위를 하든, 한 번에 여러 명과 난교를 하든 타인이 무슨 상관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바인즈의 주장은 이러한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문란한 성생활을 금지하는 레위기, 로마서, 고린도서의 경고는 바인즈에겐 여전히 유효하며, 현대적 개념의 성지향성을 충족하는 동성 관계, 즉 언약으로 맺어져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만이 성경적으로 허락된 동성 관계입니다. 

이런 주장은 세속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인습에 의존하는 바리새인 같은 신도들은 동성 간의 관계에 알레르기를 보일 것이며, 영과 육을 분리하여 사랑 없이 육신의 즐거움만 좇는 세속의 사람들은 이것을 고루하고 갑갑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매튜 바인즈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2.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신학만으로 이 서신을 끝마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저희 신앙의 참된 힘은 삶의 신비로움을 완전히 분쇄하고 모든 질문에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거대한 진실을 중심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재정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동성애가 본인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T 님께는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접근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T 형제님의 일상이 본인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만 점철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제 외람된 생각입니다. 저희 신앙 또한 신도들의 성생활을 규제하는데만 골몰하는 것도 아닙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기독교 도덕의 중심은 성(性)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죄는 악하지만, 여러 죄 중 가장 덜 악한 죄다"라고 했습니다. 

T 형제님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에게 좀 더 현실적,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는 성지향성이 아니라 고립감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눈에 뜨일까봐 연애도 할 수 없고, 성지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 신앙 공동체와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없고, 이러다 주님과도 유리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고민이, 성지향성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 좀 더 즉각적이고 무겁게 짓누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저희의 신앙은 이러한 고립감에 익숙합니다. 기독교는 본디 약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신앙입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릴지 몰라도 여호와는 나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시편 27:10) 특정한 경우 주님을 위해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있는 역량은 그 나름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9:12) 형제님이 더 직접적으로 느끼는 모든 고민과 괴로움을 주님의 발 아래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현세의 삶은 완전하지 않으나, 다음의 삶은 완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몸소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없고 우는 것도, 아픔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3-4) 이 희망을 믿으셔서 매일 은혜가 충만한 하루를 보내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