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0, 2015

종교와 시민사회: 미국 모델 대 프랑스 모델

여러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혼재하는 공동체의 경우, 종교와 시민사회는 어떤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크게 미국 모델과 프랑스 모델이 있다고 생각하며, 두 모델의 차이는 종교와 시민사회 중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있다.

(모든 모델이 그러하듯이 아래 모델들은 몇 단계의 추상화를 거쳐 나온 결과이며, 현실은 모델과 방향성은 같으나 일치하진 않는다.)

미국 모델은 위와 같다. 여러 종교 (작은 원)들이 중앙에 모여 시민사회를 형성한다. 일종의 종교 공화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여러 개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세워진 나라이다. ("다 기독교 아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18세기 유럽인들의 관점에선 퀘어커교와 영국 국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감이 있다.) 심지어 몇몇 주는 *오직* 종교의 자유만을 위해 세워진 것을 감안하면 (이를테면 펜실베니아는 퀘이커교도들이 설립한 주), 위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역사적 결과물이다.

반면 프랑스 모델은 아래와 같다.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기존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천주교에 대한 의식적 저항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종교의 영향을 거부한 세속적 사상 (laicite)에 기반하여 작동한다. 이 형태 또한 프랑스의 역사적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이 두 모델의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 미국의 시민사회는 중심이 비어있다. 다양한 종교의 공약수로 형성된 시민사회이기 때문에, 미국의 시민사회는 자체적인 동력이 없다. 그러므로 미국의 시민사회는 흰색으로 처리했다.
  • 프랑스의 시민사회의 중심은 세속주의며, 이것은 자체적인 동력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독자적 색깔이 있다.

  • 궁극적으로 보면 미국에선 무신론자는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필수적인 공약수 중 하나 (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 궁극적으로 보면 프랑스에선 종교인은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시민사회의 중심동력인 세속주의와 배치되기 때문이다.

  • 미국의 시민사회는 수축의 압력을 받는다. (화살표 방향 참조) 공약수의 크기에는 최대 한계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의 공공영역은 제한되어 있으며, 공공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계약과 거래의 양상을 띤다.
  •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팽창의 압력을 받는다. 만인의 이성적 사고의 기반한(다고 생각하는) 세속주의에는 스스로의 범위를 제한하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의 프랑스의 공공영역은 미국의 공공영역보다 비대하며 (도면의 크기 참조), 공공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하나의 이상을 향한 자기 혁신의 양상을 띤다.

  • 미국은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공약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종교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유대인 여성은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는 경우 유대교가 인정하는 이혼을 할 수 없지만, 미국 법원은 이에 개입하지 않는다. 
  • 프랑스는 종교의 사회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시민사회 자체의 동력으로 대체한다. 특정 종교가 시민사회 자체의 동력과 크게 유사한 경우 (이를테면 천주교)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대체 과정은 매우 지난하다.

  • 미국은 새로운 종교를 흡수하기 쉽다. 최소의 공약수만 받아들이면 바로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무슬림은 유럽의 무슬림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주류사회에 동화된다. 타종교에 대한 차별과 적대는 공약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선에서만 이루어진다.
  • 프랑스는 새로운 종교를 흡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종교의 사회적 부분을 시민사회에 완전히 내놓은 다음에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새로 진입하는 종교에게 이는 지나치게 값비싼 거래이다. 프랑스 시민사회 형성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종교 (=천주교) 정도만이 이러한 거래를 할 역량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든 새로운 종교는 차별과 적대를 받는다.

Wednesday, August 12, 2015

Writing About Writing

I never identified with writers who agonize over writing. Certainly their struggles are legitimate, but that simply has not been me. I think, and I write. Then I think some more, and I edit what I wrote. It has always been a fast process. I am a fast writer.

What I did not realize until recently is that I have a limited reservoir of writing in me. It doesn't matter what I write about--I can only write a certain amount in a given period of time. This reservoir is a scarce resource from which I, currently, draw in order to write a number of things except the blog and the book.

Walking away from them was easy--too easy that it scared me a bit. I need to return to them. So I write to remind myself.

Monday, July 13, 2015

Layperson as a Sanction Giver in the Internet Age

One of the distinctive features of the Internet age is the manner in which social etiquette is enforced. The mechanism itself is not new: it is in essence peer pressure, which has existed as long as the human race has existed. The distinctive part is the seeming disproportion between the violation and the punishment. For a thoughtless comment on the Internet, a job and livelihood are commonly lost.

Why is this so? One reason may be that people rarely think of themselves as sanction-givers. People usually think of themselves as merely expressing moral outrage, unaware that such expressions, once piled up, are sanctions in and of themselves. 

Some may be aware that their expressions are also sanctions, but unaware of the scale and proportionality of sanctions. This is partially because one person is unable to properly anticipate the effect of one's statement multiplied by the thousands. It is also partially because people simply are not trained--not even informally--as a sanction-giver. Expression of outrage requires no training; the moral intuition takes care of that. But the moral intuition is insufficient to create an effective sanction giver, who is essentially a policy maker. What level of sanction is enough to correct behavior? What level of sanction is fair, compared to other cases? Intuition alone does not answer these questions; a rigorous rational inquiry must also follow. Moral intuition unchecked by rational inquiry is what we see on the Internet--the permanent state of righteous indignation, seeking the next witch to burn.

Monday, May 25, 2015

기독교의 핵심

사람들이 모두 다른만큼, 신앙에 다다르는 길이 전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 존 칼뱅, C.S. 루이스와 티모시 켈러의 글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 신학자들이 설파한 기독교의 핵심에 크게 공감하여 신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티모시 켈러의 이 설교를 제 언어로 해석한 것입니다. 내용은 많이 비슷하지만 번역은 아닙니다. 신앙을 첫 접하는 사람들,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십계명이 무엇인지, 그 중 제1계명이 무엇인지는 다들 아실겁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이건 대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 "우상"이 진정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십계명에 등장하는 "우상"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아주 어려운,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해야 합니다. 즉: 당신은 왜 삽니까? 이렇게 자살하기 쉬운 세상에서, 왜 꾸역꾸역 아침에 일어나 밥을 입에 밀어넣고 그닥 가고 싶지도 않은 학교나 직장에 나갑니까? 내일은 뭐가 달라지길래 오늘을 사나요? 

이런 질문이 어렵다면, 반대로 접근해도 됩니다: 당신의 최악의 악몽은 뭔가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살할 것 같은가요? 직장에서 해고 당하면? 돈이 다 없어지면? 가족이 전부 죽으면? 사고를 당해서 얼굴이 흉칙하게 망가지면? 

여기서 나오는 대답이 당신 삶의 의미이고, 당신의 존재를 떠받치는 당신의 신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우리 주변에선, 직장과 커리어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커리어에 모든 것을 던집니다. 가족과의 화목도, 자신의 건강도 안중에 없고, 그저 일에 목숨을 겁니다. 오지의 원주민이 화산의 신에다 처녀를 공양하듯, 이들은 "커리어"라는 우상에다가 자신의 가족과 건강을 팔아넘깁니다. 

"자녀"라는 우상도 흔합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부모들은 자녀에 모든 것을 겁니다. 그렇게 과도한 기대에 엇나가버리는 자녀들의 모습 또한 흔합니다. "자녀"를 우상으로 삼은 부모는, 잘못돼버린 자녀를 보는 순간 온세상이 무너져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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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February 12, 2015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0. 열면서

요즘 트위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태그가 유행하고 있고, 저는 거기에 동참하지 않겠다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은 상당한 (대부분 부정적인)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반향의 대부분은 별반 대꾸할 가치가 없는 정념의 발산이었지만, 진중하게 반론을 제기하신 분도 간혹 계셨습니다.


반론 트윗 내용을 연결했습니다: 
"흥미로운 논의군요.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선 한 여성이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보단 한 남성의 선언이 훨씬 큰 파급력을 지닙니다. 기득권층이기 때문이죠. 흑인을 지지하는 백인들처럼. 이런 상황에선 선언이 가벼워질수록, 하나의 패션이나 유행에 가까울수록, 여성운동에겐 전략적으로 좋습니다. 지금처럼 단순한 선언 조차 무겁게 여겨지는 분위기는 운동에 매우 장애가 되지요. 가벼움은 무기입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진짜 페미니스트"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선언을 저어하는 것은, 1. 현대 한국에서 이 선언이 다양한 측면으로 얼마나 무거운지 반증하며, 2.선언을 더욱 무거이 만드는군요. 사회운동은 어디까지나 숫자의 문제이며, 허수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가벼워 유행이 된다면 그건 전략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큰 효과를 가져옵니다."
제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 싶어서 이 포스트를 씁니다.

1.  하나의 일화

"흑인을 지지하는 백인" 얘기가 나왔으니, 그와 비슷한 일화를 하나 소개 드리겠습니다.

제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 낯간지럽지만,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합니다. 전 대학 시절부터 미국 인종관계에 관심이 많아 그때부터 관련 활동에 투신해왔습니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한국과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제 블로그를 운영한지는 거의 10년이고, 졸블로그가 나름의 인기를 모아 제법 영/미 주류 언론에도 소개되고 기고도 하고 있는 위치입니다. 즉, 최소한 아시안 아메리칸 사회에서 전 순전한 필부필부는 아니란 말씀입니다. 곧 설명드릴 사건에 대한 배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런 설명을 드립니다.

콜베어 리포트 배너입니다.
(source)

미국 인기 시사 코메디 프로그램 중 "콜베어 리포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년에 이 프로그램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을 차별한다고 보일 소지가 있는 개그가 나왔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곧 아시안 아메리칸 활동가들이 반응했고, 전선이 짜여졌습니다. 강경파는 "이것은 차별이다, 사과해야한다"라는 주장이었고, 제가 속한 온건파는 "전체적 맥락을 보면 차별할 의도가 보이지 않으니 넘어가야한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강경파들은 강경파답게 온건파에게 "배신자"라며 맹공했습니다. 제게도 엄청난 욕설과 비난이 쏟아졌죠. 활동하면서 당연히 있는 일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저를 가장 극렬하게 공격한 사람들은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아니라,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에 끼어있는 백인 활동가들이었습니다. "나는 저것을 차별로 보지 않는다"라고 했더니 백인활동가들이 저보고 "너는 백인 우월주의에 찌들은 인종차별주의자다"라고 하기도 했고요. 평생 1초도 인종을 이유로 차별받아보지 않은 이들이 20년 가까이 활동을 해온 저에게 "네 생각은 상관없고, 우리가 이것은 차별이라고 정했으니 받아들여라"라고 주장하는, 지극히 우스운 꼬락서니였습니다.  

제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태그를 달 수 없는 이유는, 저런 백인 활동가의 우스꽝스런 모양새를 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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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29, 2015

T 형제에게 보내는 서신

신앙의 형제 T님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3)

제게 이메일로 신앙 상담을 하시려 연락을 주셨는데, 이렇게 좀 더 공개적인 형태로 답변을 드려서 송구합니다. 그러나 T님의 고민은 T님 혼자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저희 신앙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큰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에, T님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에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 공간을 빌었습니다.

T님은 동성애자시라고 말씀 주셨습니다. 비록 T님이 다니시는 교회에선 적극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회를 하거나 달리 탄압을 하진 않지만, 동성애는 창조원리에 위배되는 죄악이며 정신병이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의 성지향성을 포기할 수 없기에, 신앙생활에서 마음에 큰 짐을 짊어지게 되실 것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고민을 저를 믿고 털어놓아 주셔서 과분함을 느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조금이라도 T 형제님의 짐을 덜고자 노력하려 합니다.

1.

먼저 상기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가 동성애를 대하는 시각은 하나가 아니며, 동성애 이슈가 대두된 것이 최근이니만큼, 그 이슈에 대한 신학적 반응 또한 확정된 것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란 점입니다. 성공회의 대부분은 동성애를 긍정하며, 각 수백만 명의 신도를 지닌 미국 최대의 루터교 종파와 장로교 종파 또한 동성애를 긍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종파가 동성애에 대한 재해석을 거칠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물론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쉽지 않다"라는 말은 양방향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쉽게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신앙의 형제들에게 얼마나 큰 괴로움을 끼치는지, 그것이 진정 주님의 사랑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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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25, 2015

"교회의 으뜸가는 죄"

[이 연작 트윗의 주요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미국 교회의 으뜸가는 죄는 그 교회의 울타리 바깥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번영하는 목회와 그렇지 않은 목회의 가장 기본적 차이는 바로 이 능력, 즉 이 테이블에 앉아있지 않은 이들은 누구인가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이 사람들을 상상할 능력이 없이는, 즉 신이 바라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인지할 능력 없이는 지속적, 효과적, 신앙적으로 이 테이블을 계속 확장할 수가 없다. 이것이 죄인 이유는, 교회가 자라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회를 필요로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게되기 때문이다.

Friday, January 16, 2015

"나는 샤를리다"의 진짜 의미

(source)
이 많은 파리시민들은 무엇을 지지하려 거리로 나선 것일까.

"표현의 자유"라는 흰소리는 집어치워라. 샤를리 엡도를 비꼰 프랑스 코메디언 듀도네는 '테러를 옹호한다'라는 명목으로 즉시 체포되었지만, 수많은 파리 시민들이 "나는 듀도네다"라는 사인을 들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시위를 하지는 않는다. 

테러에 대한 거부와 인명 존중?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다. 샤를리 엡도가 네오나치 잡지였다고 가정해보자. 인명은 똑같이 존중되어야 하고 테러는 나쁜 것이라는 원칙을 천명하기 위해 과연 수백만 명의 프랑스 시민들이 "나는 네오나치다"라는 사인을 들고 거리를 행진할 것인가?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진의는 말이 아닌 행동에서 볼 수 있다. 샤를리 엡도 테러 이후 마린 르 펜의 민족전선 지지도는 나날히 상승하고, 수많은 모스크와 무슬림의 생활권에는 방화와 총격이 난무한다. 

그래서 다시 물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사인을 들고 행진하는 프랑스인들은, 대체 무엇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가.

Friday, January 9, 2015

설득 대 개종

앞선 포스트에서 설득보다 강한 힘은 개종이라고 소개했다. '개종의 예술'을 논하기 전에, 설득과 개종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왜 개종은 설득보다 강력한지에 대한 논의가 선결되어야할 것 같다.

'개종'이란 단어는 필연적으로 '종교'라는 개념을 소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종'은 꼭 종교를 바꾼다는 내용은 아니다. '세계관'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세계관을 바꾼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나의 정의는 이렇다: 담론의 시작점을 바꾸는 것. 거대하고 높은 산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첫 걸음을 어떻게 내딛고, 열 번째, 백 번째 걸음을 어느 방향으로 내딛느냐에 따라서 내려오는 길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그 큰 산의 표면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발걸음의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것이 '설득'이라면, 시작하는 산 자체를 바꾸는 것이 '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설득이 전투의 기술이라면, 개종은 그 전투가 시작도 하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외교술이다. 때문에 자연히 개종은 설득보다 강하며, 진정한 사회적 변혁은 대개 설득이 아닌 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방백. 인간사회는 뚝뚝 떨어진 산 하나씩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큰 산이 모이고 겹친 고원이며 서로 다른 산에서 내려와도 아래쪽에 겹치는 길은 많다는 점은 상기해야할 것이다.)

이 사실은 인간사회 모든 면에서 드러난다. 이를테면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란 개념을 통해,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증거를 쌓아올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 (이 포스트에서 쓰이는 '세계관'이란 개념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이 등장하여 기존의 사실을 재정돈함으로서 이루어진다고 관찰했다. 즉 사실 하나하나를 연구하는 것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정돈하여야하는 원칙을 바꾸는 것이 과학의 발전이란 것이다. 

개종이 설득보다 강하다는 것은 이론적인 논의만이 아니다. 임상학적으로도 개종된 인간은 설득에 면역이 생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2013년 예일대학교 실험에서는, 실험군을 둘로 나누어 실질적으로 같은 응용수학문제를 풀게 했다. 하나의 실험군에게는, 지문에 정치색이 짙게 들어간 응용문제를 주었고 (총기소유에 대한 내용), 또 다른 하나는 정치색이 없는 문제를 주었다 (단순 피부병에 대한 내용). 

결과는? 수학적으로는 완전히 같은 문제였지만, 정치색이 들어간 문제의 정답률은 널을 뛰었다. 문제가 본인의 평소 정치적 성향과 합치한 경우 정답률은 크게 상승했고, 정치적 성향이 반대인 경우 정답률은 하강했다. 게다가 이 추세는 수학을 잘 하는 사람일 수록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즉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평소의 정치적 성향 (=이 또한 '세계관'의 일부)에 거스르면 글자 그대로 *지능이 떨어진다*. 세계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설득'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이성적 사고의 틈새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현실적 경험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이념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취사, 해석한다는 건 두 번 말하면 입 아프다. 세계관이 '친일파 타도'인 사람에게는 영덕 대게 그림도 욱일기며, 세계관이 '때려잡자 빨갱이'인 사람에게는 전두환도 민주주의의 화신이다. 이들에게 설득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이념적 성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언정, *세계관이 없는 사람이란 없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이 유연한 사람도 결국에는 본인의 세계관과 합치하는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이고 설득된다. 즉 설득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앞서 말한 설득의 세 요소뿐만 아니라, 상대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나의 세계관과는 어떻게 다른지도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개종은 쉽지 않다. 설득보다 효과가 큰만큼 난이도도 훨씬 높다. 일생에 한 번이라도 개종을 겪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며, 여러 타인을 개종시키는 것은 물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엄청나다. 물 위를 걷는 것은 초현실적일지 모르나, 개종은 현실 자체를 휘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Tuesday, January 6, 2015

설득의 예술


오늘 하루 트위터를 뜨겁게 달군 조기숙 교수의 트윗이다. 무엇보다 사실관계가 틀렸기 때문에 머쓱해지는 내용이다. ("갑질"은 없었다. 마트 주차장의 CCTV를 판독한 결과 알바생이 먼저 고객에게 위협적 행동을 했으며 처음에 사과도 건성으로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 것이 훨씬 더 설득력있다. 무슨 잘못을 했건 무릎을 꿇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갑질"이란 개념어의 정의가 나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리라.)

사실관계를 차치하더라도, 저 트윗은 실패했다. "비굴해지지 말라"라는 조 교수의 주장은 전혀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저 알배생들의 사정도 모르면서 어디서 꼰대질이냐"라는 거센 역풍만 초래했다. 설득에 실패한 것이다.

설득처럼 강력한 힘은 세상에 또 있지 않다. 폭력이나 위협 없이 타인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 이 얼마나 큰 힘인가. 어떻게 해야 잘 설득할 수 있는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돌릴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은, 인생의 기본 기술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다.

설득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나는 아르스토텔레스의 고전적 해설보다 나은 방법론을 아직 본 적이 없으므로, 그 내용을 설명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세 가지 유형"을 설파했는데, 에소스 Ethos, 페이소스 Pathos 그리고 로고스 Logos 이다. 

에소스는 '화자에 대한 신뢰도'이다. 발화자가 직접 경험한 내용이나, 발화자가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는 내용을 사용한 주장은 그 설득력이 높다. 페이소스는 '감정선'이다. '감정에 호소'라는 표현은 대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은근한 감정적 소구력이 있는 주장이 더 설득력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로고스는 '논리'다. 탄탄한 논리가 있는 주장은 또한 설득력이 강하다. 

설득의 현장을 전투라고 본다면, 에소스는 지형이요 페이소스는 병사 개개인의 전투 능력, 로고스는 작전과 전술이라고 생각한다. 셋 중 하나만 유리해도 이길 수는 있을지 모르나, 승리의 확률을 극대화하려면 마땅히 세 요소가 전부 유리해야한다. 설득도 마찬가지다. 상황에 따라 이 셋 중 하나만 가지고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고, 셋 중 둘만 가지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득력을 극대화하려면 설득의 세 가지 유형이 전부 필요하며, 세 가지 유형을 전부 갖춘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높다.

이에 미루어 보면 조 교수의 트윗이 왜 실패했는지 곧 알 수 있다. 조 교수의 로고스는 기실 나쁘지 않다. 조 교수의 논리는 "불의에 맞서 저항하라"이며, 이 로고스는 틀리지 않다. 뒤집어 생각해보라. 조 교수가 "살다보면 먹고살기 위해 무릎 좀 꿇을 때도 있는 거다"라고 했다면 엄청난 칭찬을 받았을 것인가?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나머지 두 요소다. 조 교수는 에소스에서 이미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이는 조 교수의 트윗경력에서 상당부분 기인한다. (조 교수가 어쩌다 트위터에서 이런 위치까지 왔는지, 이런 위치에 처한 것이 정당한 것인지는 논외로 하겠다.) 트윗경력을 제한다하더라도, 먹고살만한 50대의 대학교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의 삶에 대한 담론에 별다른 무게감을 가져올 수 없다.

하지만 조 교수의 결정적 실패는 페이소스다. 앞뒤 사정이 어찌되었든, '무릎을 꿇었다'라는 자극적 사실에 이미 감정은 격앙되어 있었고, 또한 트위터는 진상에게 당하는 젊은 비정규직 서비스업 종사자들로 넘쳐나기에, 언제든지 저 무릎 꿇은 알바생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곳이다. 이 감정선을 읽지 못하고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를테면 불리한 지형에서 허기진 병사들을 데리고 전투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휘관의 전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즉 조 교수의 로고스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패배의 확률이 높다.

(방백. 조 교수를 비판한답시고 "우린 모두 이렇게 약하기 때문에 저항 따위 불가능하다"라는 얘기를 꺼내드는 사람이 많았다. 저항하지 않겠다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 조 교수의 발언이 어디가 잘못되었나 인지하지 못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촌극이다. 주장에 반론을 펼치려면 약점을 노려야 하며, 조 교수의 약점은 페이소스이다. 그걸 놔두고 조 교수의 강점인 로고스를 공략하니 스텝이 꼬이는 것이다.)

범위를 넓혀서 보면, 인터넷에서 흔히 일어나는 '병림픽'의 양상도 이러한 각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익명의 인터넷에서는 에소스가 작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빈 자리에서 페이소스와 로고스가 널뛰듯 담론을 휘두른다. 신상을 속이는 주작질도, 통계자료의 공정함을 두고 일어나는 개싸움도 어떻게는 에소스를 소구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설득의 하수들은 인터넷의 우중은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이는 풀파워의 1/3 밖에 쓰지 못하는 주제에 내뱉는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또 저런 불평하는 이 중 제대로 논리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추.  앞서 "설득처럼 강력한 힘은 세상에 또 있지 않다"고 술했으나, 사실 설득보다 강력한 것이 하나 있다. "개종"이다. 개종의 예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Thursday, January 1, 2015

2015년 신년사

2015년에는 독자분들 모두 의미있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흔히들 "행복한 삶"을 꿈꾸고, 기원합니다. 다들 "행복하려고 사는 것 아니냐"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을 하는 이들에게 "행복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대답은 시원치 않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가족," "건강," "물질적 풍요" 정도의 대답이나 나오는 것이 고작입니다.

하지만 가족, 건강,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건강한 젊은이는 그 나름의 걱정이 있고, 풍요로운 부자는 또 그 사람 나름의 걱정이 있습니다. 또한 가족이 없고, 건강이 안 좋고 경제사정이 안 좋아도 기운차게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 주변에는 흔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모두가 바라는 것이라면 다들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도는 쉽게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들 바라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행복하지 않아도 사람은 살 수 있지만, 의미를 잃어버린 순간 사람은 죽습니다. 의미있는 삶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수십 년, 평생의 불행 정도는 거뜬히 이겨낼 수 있으며, 삶 자체를 초개같이 던져버리기도 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엔진이라면, "의미"는 그 엔진을 가동시키는 연료입니다. 휘발유로 가는 자동차에 물을 넣으면 움직이지 않듯이, 인간의 영혼에 "의미"가 아닌 그 어떤 것을 넣어도 영혼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미가 부여된 영혼은 그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합니다. 의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자연히 가슴에 기쁨이 벅차오릅니다. 의미있는 삶을 사는 인간에게도 불행과 고통은 찾아오지만, 다른 사람을 꺾어버릴만한 불행과 고통 앞에서도 의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초연하고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변치않는, 하루하루의 삶에 동기가 부여되는 의미를 찾는 2015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 이는 2014년 신년사의 재탕이다. 불만있는 분에게는 전액 환불을 약속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