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1, 2014

2014년 10월 29일자 퇴고와 기교

서태지의 신곡 "소격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포스팅을 올렸다.

He actually grew up in the neighborhood, having attended the nearby Jaedong Elementary School.

- 최근 내 글이 "입에 짝짝 붙는다"라는 상찬을 들었다. 아마도 글을 쓸 때 언제나 리듬감을 고려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시가 아닌 산문인 경우에도 리듬감이 있어야 읽기 쉽고 내용전달이 잘 된다. 이 문장의 리듬감에 주목하기 바란다. 쉼표 앞은 짧고 힘있고, 쉼표 뒤는 조금 더 편안하고 서술적이다. "강-약"의 리듬감이다.

- "having"처럼 현재진행형을 사용해서 앞 문장을 부연하는 것은 자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형태이다. 꼭 숙지할 것을 권한다.

To be sure, the situation was better than North Korea's--but not by that much.

- "not by much"라는 표현은 상당히 유용하다. 외울 것을 권한다.

It is believed that approximately 1,100 students were forcibly drafted during the School Greening Project; six were killed in the process.

- 이 문장에서 세미콜론으로 연결할지, 마침표로 두 문장을 만들지 많이 고민하다 전자를 택했으나, 아직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여섯 명이 죽었다"를 부각시키려면 마침표, 빨리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려면 세미콜론. 결국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이 어려운 것이다.

Saturday, October 18, 2014

2014년 10월 18일자 퇴고와 기교

한국의 노동 생산성에 대한 포스트를 썼다.

As much as Koreans love their food, gastronomical pleasure alone does not explain why Korea has nearly seven times more restaurants per capita than Americans do.
고급 영어일 수록 추상명사가 주어로 오는 경우가 많다. 위 문장에서는 gastronomical pleasure 대신 The fact that Koreans love their food alone does not explain (...) 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이 경우 글의 수준은 급격히 떨어진다.

If Korea's corporate culture were dragging down Korea's labor productivity, one should expect to see that drag across all sectors.

이것은 좋은 글쓰기라기보다는 내 개인적 스타일이나, 일반적인 내용을 논의할 때 one을 주어로 쓰는 것은 you를 쓰는 것보다 수준 높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한다.

Sunday, October 12, 2014

2014년 10월 6일, 10월 11일자 퇴고와 기교

신해철1차 세계대전에 대한 글을 본 블로그에 올렸다.

As we climb higher into the rarefied heights of Korean pop music history, a concise statement of an artist's importance is approaching ever closer to impossible.

Rarefied는 아주 좋아하는 단어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쓰려고 하는 단어이다. 자신의 트레이트마크처럼 종종 쓰는 어려운 단어를 지니는 것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계발하는데에 도움이 된다.

The best pop artists do not simply influence the artists who come after them; they change the society around them. 

두 문장을 세미콜론으로 연결했다. 적절한 곳에 쓰이는 세미콜론은 글이 늘어지지 않게 해준다.

Fortunately, the Germans stuck around just long enough to teach the locals how to make proper beer.

"just [형용사] enough to"처럼 위트 있는 숙어 또한 머릿속 단어장에 많이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Friday, September 5, 2014

사랑 속에서 진리를 말하라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 에베소서 4장 15절 (현대인의 성경)

요즘 가장 가슴 속에 남는 성경 구절이다. 한 단어 한 단어 곱씹게 된다. 그냥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

기독신학에서 신은 온전한 진리 그 자체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최소한 진리의 일부는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뜻을 전부 알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또한 모든 진리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하는 비유는 실제로 인간이 맞닥뜨리는 한계에 비하면 지나치게 스케일이 작은 비유가 아닐까 싶다. 신과 모든 진리를 마주하는 인간은, 냄새를 맡지 못 하는 개미가 항공모함 안에서 그 배의 크기와 모양을 가늠하려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진리의 한 조각 정도는 가지고 있다. ("진리의 한 조각"은 "일리"가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혹자는 자기가 지닌 진리의 파편을 높이 들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여긴다. 리처드 도킨스의 최근 글에 그러한 태도가 잘 드러난다. 아무리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라도 감정을 배제하기만 한다면 이성이 전부 해결해 줄 것이란 논지. 지난 150년간 주류 논리가 되어버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그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그러한 "이성"을 숭배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감정적 버튼을 훤히 만천하에 드러내고 다니며, 그 버튼이 눌리면 부들부들 떨며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가? 도킨스의 무신론은 그 자체가 거대한 감정적 반응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그것은 다른 무신론자들도 그를 비판하게 만드는 기제가 되었다. 상대방의 관점에 대한 배려 없이 "내가 틀린 말했냐"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리있는 말 한 마디, 진리의 한 조각을 내세우며 위세하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기독신학에서 이는 스스로를 지옥으로 보내는 첫 걸음이다. 티모시 켈러는 C.S. 루이스의 저서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온 지옥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옥은 괴로운 곳이며, C.S. 루이스는 이 괴로움의 원천을 설명한다. 인간의 교만, 근거 없는 피해망상, 자기 연민이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어! 다 멍청이들이야!라고 확신에 차서 외친다. 그들의 인간성은 완전히 사라지며, 사리분별력 또한 사라져버린다. 자기중심성이란 감옥에 최종적으로, 완전히 갇혀버린 것이다. 그들의 교만은 서서히 점점 더 거대한 버섯구름을 형성하며 확장한다. 그들은 계속하여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탓하며 산산히 조각난다. 이것이 지옥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민함을 바탕으로 남보다 좀 더 큰 진리의 조각을 들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진리의 조각이 남들 것에 비해 얼마나 더 큰지나 자랑하고 다닌다면 그 진리의 파편은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그 파편 앞에서 자신이 작아질 뿐이며, 결국 자기 눈에만 커보이는 진리의 파편 안에 함몰될 뿐이다. 그 주화입마의 상태가 기독교의 지옥이다. [1]

일리있는 말을 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지적능력만 갖춘 이라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일층 어려운 것은 사랑으로 일리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이는 다른 이들이 들고 있는 진리의 파편들 또한 모으게 되어, 최종적 진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된다.

'싸가지 있는 진보'가 요즘 화두이다. 그러한 화두를 던진 강준만 본인의 역사를 생각하면 실소가 나올 수도 있고, 그 화두에 대한 진중권의 비판 또한 일리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실명비판을 해야한다'며 기세등등하게 덤비던 논객이 (당시 한국사회에서 실명비판이 필요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시련을 겪은 다음에야 '싸가지 있는 진보'론을 들고 나온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반증이 아닌가 싶다.

-주석-
[1] C.S. 루이스와 티모시 켈러의 지옥론에 대한 기독신학적 반론은 Iain Campbell의 Engaging with Keller를 참조.

Saturday, August 30, 2014

2014년 8월 29일자 퇴고와 기교

본진 블로그에 이민자들은 어떤 나라의 스포츠 팀을 응원해야 하는가에 대해 썼다.

I was alternately giving the play-by-play, singing the Cal fight song, and chanting and screaming incomprehensibly. In a bus full of tourists who couldn't care less.

- 두번째 문장은 주어와 동사가 없이 부사구 하나만 덜렁 떠있는 비문이다. 첫 문장에 등장한 내가 한 짓거리는 꽤 우습다. 그 짓을 사람이 가득 찬 버스 안에서 했다는 것은 더더욱 우습다. 개그 포인트를 향상시키려면 이런 식으로 비문을 무릅쓰고 일종의 원투 펀치를 날리는 것도 방법이다.

When the Lakers make their once-a-year trip to Washington D.C., I always go--although the Wizards bilk fans like me by charging $200 for a crappy seat.

- 좋은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글쓰기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문장에서 bilk란 단어는 "바가지 씌우다"라는 뜻이며, 한국어의 "바가지 씌우다"에 담긴 억울한 감정이 똑같이 묻어나는 단어이다. 만약 여기에 예를 들어 overcharge 같은 단어를 썼다면, 분명 문어적 뜻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달되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Overcharge는 주로 공문서에 등장하는 단어이다.)

- 대쉬(--)는 문장의 리듬감을 조절하는 데에 아주 유용하다. "go" 다음에는 대쉬 대신 쉼표를 넣어도 적절했을 것이나, I always go 같이 짧은 구절에 앞뒤로 쉼표를 넣으면 문장이 늘어지는 느낌이다. 숨 돌릴 기회를 주면서도 다음 내용으로 재빨리 움직이기 위해 대쉬를 넣었다. 하지만 나는 대쉬를 지나치게 남용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조심하는 부분이다.

This is not going to be a flip dismissal about the importance of sports loyalty, of the kind often given by people who do not understand the value of sports and dismiss it as grown-ups playing with a ball.

- 이런 문장에 "of the kind"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여 중문을 만들 수 있다면 그대는 영작 최고봉에 거의 다 온 셈이다. "of the kind" 같은 접속사 없이 같은 내용을 전달하려면 내용이 겹치는 문장 두세 개가 등장할 것이나, 적절한 접속사로 간명한 문장 하나로 연결해낼 수 있다.

Each match is a work of art, reflective of the nuanced highs and lows of the life itself. 

- "art"와 "reflective" 사이에는 "which is"가 빠져있다. 이런 식으로 긴 형용사구를 명사 뒤에 놓아 수식하는 모양새는 아주 자주 쓸 수 있는 고급형태이므로, 꼭 숙지하기 바란다.

It is one thing to deeply engage in a metaphor, quite another to allow it to consume reality. 
--> It is one thing to deeply engage in a metaphor, quite another to let it consume reality.

- 문법적 요소도 단어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이 문맥에서 allow와 let은 뜻이 같으나, let은 사역동사이기 때문에 뒤에 동사원형 (consume)을 직접 가져올 수 있다. 즉 allow를 let으로 바꿈으로서 문장에서 to라는 단어를 뺄 수 있는 것이다. 단어를 가장 적게 쓰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부 전달하는 것이 간명한 글쓰기의 기본이다.

But if we should treat our sports opponents as enemies on the battlefield, there is no reason why we should not call for more bean balls to the head, more chop blocks designed to break the knee. 

- "more . . .,  more . . ."로 시작하는 동격구에 주목. 동격구를 잘 활용하면 and나 or 같은 접속사 없이도 리듬감있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

Sunday, August 24, 2014

2014년 8월 24일자 퇴고와 기교

주로 영어로 글을 쓰다보니 영어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언젠가 영어공부에 대한 개인적 소회를 풀어놓으려 한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예시를 위해 내가 본진 블로그에 글을 쓰고 퇴고하면서 내가 초본에 썼던 내용을 교정하거나, 무언가 작가로서의 기교를 발휘한 부분을 몇 군데 소개하려 한다. 가능하면 본진 블로그에 글을 하나 쓸 때마다 이런 포스트를 병행할 예정이다.

오늘자 포스트에는 드렁큰 타이거에 관한 내용을 썼다.

Korean hip hop can be considered a forest, with many a skilled hand that planted, tended and lovingly nurtured each tree.

- "many a [단수형]"은 문어적 표현으로, "정말 많다"는 느낌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 "planted, tended and lovingly nurtured"은 선호하는 형태. [동사]+[동사]+[동사]는 갑갑해지기 쉬우므로, 마지막 동사 앞에 부사를 넣어 [동사]+[동사]+[부사]+[동사]의 형태로 리듬의 변화를 준다.

The hip hop-esque music from the transitional period of 1990s is sometimes referred to as "rap dance," a genre that is still alive and well in Korea.

- "rap dance" 다음에는 "which is"가 빠져있다. 동격구를 사용함으로서 단어 두 개를 없앨 수 있다면 그 길을 취하는 것이 좋다.

But they did grow a forest from what seemed to be a hostile, infertile land --> But they did raise a forest from what seemed to be a hostile, infertile land

- "키워냈다"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처음에는 "grow"라는 동사를 썼으나, "raise"로 바꿨다. 진짜 숲이나 식물을 키워냈다는 함의를 전달하려면 grow가 옳으나, 아이를 키워내는 듯한 과정의 비유라는 생각 때문에 raise가 더 효과적이라고 느꼈다.
- "hostile, infertile land":  "very" 같은 의미 없는 강조어를 피하는 것은 영작의 기본 규칙 중 하나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렇게 유의어를 두어번 반복하는 식으로 한다.

Wednesday, August 13, 2014

한국 관련 믿을 만한 외신

외신이 한국에 대해 무슨 말을 하나 관심들이 많다. 국제적으로 한국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관심 갖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미국은 이걸 너무 안 해서 문제다.) 하지만 외신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문제다. 국제사회가 보고 있다는 중압감을 (상대편에) 발휘하고 싶고, 한국의 언론은 믿을 수 없다는 의식도 있기 때문에, "외신이 이랬더랜다"라는 전가의 보도가 휘둘려 지는 모습이 아주, 아주 자주 보인다.

외국 사는 입장에서 볼 때, 그 전가의 보도는 종종 우스꽝스러운 썩은 지푸라기다. 아무래도 한국에 사는 경우 어떤 외신은 공신력이 있고 어떤 외신은 "찌라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가 크다. 게다가 이름난 외신이라 하여 한국에 대해 잘 안다는 보장도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임 (Time Magazine; 런던의 "타임즈"가 아니다) 이나 BBC가 한국에 대해 보도하는 모습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인상비평에 불과한 외신 기사를 들고 "세계 여론이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며 목청 높이는 것은 보기 민망할 정도다.

거의 대부분의 외신은 한국에 지국이나 상주 특파원이 없고, 홍콩이나 일본에 위치한 "아시아 특파원"이 한국 뉴스까지 커버한다. 이러한 "아시아 특파원"들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도 없고 한국에 별다른 인적 네트워크도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나오는 영자지와 한국에 대하여 쓰는 영어 블로그에 기반하여 기사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블로그 AAK!의 내용이 약간만 바뀌어 기사화된 경우도 많다. 링크라도 걸어주면 양반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외신은 한국에 상주하는 프리랜서 기자들에게 많이 의존한다. 한국에서 뉴스거리가 나오면 급히 프리랜서 기자들에게 연락해서 기사를 만들어 내어 싣는 형식이다. 문제는 외신 편집부는 대부분 한국에 대해 상당히 기본적인 배경도 없기 때문에 좋은 기사, 기고를 부실한 기사, 기고와 구분할 역량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이를테면 프리랜서가 CNN의 명패를 달고 기사를 내었다 하여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CNN 수준의 기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도저히 기자 단위로 찾아읽을 여력이 없다면, 뉴욕 타임즈, 월 스트리트 저널,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 타임즈를 추천한다. 이 네 군데 신문/잡지는 한국에 상주하는 특파원이나 한국 지국이 있고, 때문에 한국에 대한 기사의 질이 다른 외신에 비해 월등히 높다. 다루는 정보나 논평의 깊이가 한국 국내 언론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한국 관련 뉴스만 다루는 블로그를 개설한 WSJ의 최근 약진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외신의 한계 때문에, 한국 관련 외신 뉴스는 기자 단위로 신뢰도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 개인적으로 한국 관련 뉴스에 대해 내가 가장 신뢰하는 기자들과 그들의 소속은 다음과 같다:

- Choe Sang-hun [최상훈]:  뉴욕 타임즈 한국 특파원
- Alastair Gale:  WSJ 한국 지국장
- 그 외 WSJ의 Korea Real Time 블로그 소속 정규 기자 전원. (외부 기고인들은 제외.)
- Simon Mundy:  파이낸셜 타임즈 한국 특파원
- Geoffrey Cain:  프리랜서. 주로 Global Post에 가장 자주 등장.
- James Pearson:  로이터 한국 특파원

그 외 더 있으나 지금 당장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날 때마다 때때로 목록에 추가하겠다. 이코노미스트는 원칙적으로 개인 기자 이름을 기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참조 바란다.

첨언 1 - 1980-90년대의 기억이 남아서인지, 타임紙를 정론지로 여기고 많은 신뢰를 부여하는 경우가 잦다. 유통기한이 지난 인식이다. 타임은 아시아를 커버할 능력을 잃은 지 오래며, 다른 뉴스에서도 미국 여론을 선도할 역량을 잃은 지 최소한 10년은 지났다. 여론선도력이 뛰어난 미국 언론사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트에서 설명하겠다.

첨언 2 - 한국에서 "외신이 이렇게 보도했다"며 강한 정치적 주장이 뒤따르는 경우, 가급적 원문을 읽어볼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억지스런 번역 혹은 노골적인 오역으로 아전인수격 주장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으며, 심지어 대형 언론사도 종종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