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3, 2017

2016 U.S. Presidential Election Reader

2016년 미 대선의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이었으며, 그 충격파에 걸맞게 오만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여러 갈래의 분석 중 가장 잘 주장된 서적 및 기사들을 모아봤다.

분석 1.  힐러리 클린턴 선거팀의 잘못된 캠페인 전략.

Edward Isaac-Dovere, Politico:  How Clinton Lost Michigan--and Blew the Election. 미시건,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세 주를 합쳐 7만 표 이하로 승부가 갈린 선거라는 점에 집중하면, 클린턴 캠프의 미시건 주 전략 실패가 뼈아팠다. 미시건 현장에 있었던 자원봉사자들은 위험신호를 감지했고 계속 증원요청을 했으나, 잘못된 데이터에 의존하던 클린턴 선거본부는 증원을 거부했고, 본부가 위험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분석 2.  후보로서의 클린턴 매력 부족, 혹은 민주당 유권자들의 안일함.

Michael D. Regan, PBS: What does Voter Turnout Tell us about the 2016 Election? 특히 중서부에서 2016년의 클린턴은 2012년 오바마에 비해 모든 유권자층에서 표를 덜 받았고, 상대적으로 2012년의 롬니 수준을 지켜낸 2016년의 트럼프가 결국 승리했다는 분석. 대통령이 재선을 노리는 선거가 아닌 경우 대개 투표율이 올라가지만, 이례적으로 2016년에선 19개 주에서 투표율이 하락했다. 오바마가 특출할 정도로 투표율을 상승시키는 정치인인지, 민주당 유권자들이 클린턴 우세를 짐작하고 안일하게 대응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분석 3. 중서부의 쇠락.

J.D. Vance: Hillbilly Elegy.  이번 선거 최고의 베스트셀러. 가난한 오하이오 출신으로 군대를 다녀와 예일 로스쿨을 나온 작가의 자서전. 민주, 공화 양당이 합심하여 정책적으로 중서부를 포기했고, 이것이 원래 그 지역에 살던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출신의 바람직하지 않는 문화와 결합하여 절망적 상황을 창조했다. 

선거에 대한 직접적인 코멘트는 하지 않지만, 작가의 결론에다가 "고로 중서부 주민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다"라는 부연을 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분석 1과 연관이 있으나, 선거 전략적 문제가 아니라 그 하부에 있는 트렌드를 관찰한다는 점이 다르다.

분석 4. 하층민의 절망.

Chris Arnade, the Guardian:  What I Learned After 100,000 Miles on the Road Talking to Trump Supporters.  원래 작가는 미국의 마약중독 및 자살 문제에 대해 연구하려 했으나 마약문제가 심각하고 자살률이 높은 지역일 수록 트럼프 지지가 높다는 점을 관찰하고, 트럼프 지지자들은 '위대한 미국'이란 이미지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며, 위대한 미국 국민에 걸맞지 않는 자신의 삶에 절망하고, 그러한 삶까지 이르게 한 상류층을 저주하는 의미로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해석.

분석 2와 비슷하고 실제로 중서부에 많이 집중하지만, 분석 자체는 중서부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분석 5. 신자유주의 좌파의 실패.

John B. Judis:  The Populist Explosion: How the Great Recession Transformed American and European Politics.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부유층에 반발하는 포퓰리즘의 동력이 생겨났으나, 오바마는 이 동력을 좌파적 방향으로 흡수하지 못 했기 때문에 결국 이 동력은 유럽과 비슷한 극우파로 이동했다는 분석. 

분석 2, 3과 비슷한 맥락이나 경제 정책에 중점을 두어 미국과 유럽을 뭉뚱그렸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Matt Stoller, Washington Post:  Democrats Can't Win Until They Realize how Bad Obama's Financial Policies were.  좀 더 미시적으로, 미국의 민주당은 빌 클린턴 시대 이후부터 민중의 당의 되기를 포기했으며, 그러한 기조를 이어받은 오바마는 세계 금융위기라는 절호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만을 돕고 주택소유자들의 구제를 게을리 함으로서 노동자 친화적인 정책을 수립할 기회를 걷어차버렸다는 분석.

분석 6. 소수자가 되어가는 백인들의 불안감.

Justin Gest:  The New Minority: White Working Class Politics in an Age of Immigration and Inequality.   '백인'이란 변인에 집중하고 그들이 경제정책 및 이민정책에 어떠한 식으로 반응하여 어떠한 정치적 선택을 내리는가를 분석하여 인종적 정치역학을 분석.  분석 3, 4와 연계된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연구. 인종차별주의라는 변인에 집중하진 않지만, 영국와 미국 유권자들을 '백인'이란 층위로 연결하여 분석한다는 점에서 암묵적으로 이 부분을 조명한다.

분석 7. 흑인 대통령에 대한 백인들의 반감과 인종차별.

Dylan Matthews, Vox:  Taking Trump Voters' Concerns Seriously Means Listening to What They're Actually Saying.  실제 트럼프 지지자들의 경제적 위치를 봤을 때 대부분의 트럼프 지지자들은 중산층이고 실제로 경제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계층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며, 트럼프 지지의 주 동력은 인종차별주의란 분석. 경제적 변인에 중점을 둔 분석 5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

분석 8. 인구학적 될놈될.

Nate Silver, FiveThirtyEight:  Clinton's Ground Game Didn't Cost Her the Election.  클린턴이 미시건이나 위스컨신에서 캠페인을 안 하기도 했지만, 캠페인을 매우 열심히 한 펜실베니아에서 패배 격차가 위스컨신 패배 격차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봤을 때, 미시적 선거 전략 혹은 캠페인의 자원배치 결정은 선거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분석. 분석 1과 배치되는 주장.

개인적 분석.

개인적으론 데이터가 결여된 분석은 참조는 하지만 그다지 신뢰는 하지 않기 때문에, 분석 3과 4는 크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미국사회의 큰 흐름을 설명한다고는 볼 수 있지만, 이 분석들에 나타난 사람들을 두고 "그래서 이들은 트럼프를 지지한다"라는 결론이 선뜻 나오지는 않는다.

분석 1은 분석 8의 데이터로 논파당하고, 분석 5는 진보진영 사이에선 대세로 잡혀가고 있지만 분석 7 데이터가 지적하는 바에 할 말이 없다. 그러므로 현재로선 분석 2 (클린턴 개인의 역량부족, 혹은 오바마가 먼치킨이었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 분석 6 (경제적 요소가 섞인 인종차별성 경향), 분석 7 (그냥 인종차별), 분석 8 (미시적 선거전략은 별 의미 없음) 정도로 가닥을 잡고 있다.

Monday, March 21, 2016

New Orleans Thoughts

Perhaps I went in with too much expectations. New Orleans was sitting at the very top of the U.S. cities that I have been wanting for visit. This itch has been with me for nearly a decade. The city has everything I like. Cajun food! Jazz! Gambling! Drinking! 

Never meet your heroes, they say. Perhaps they should also say never visit your dream city.

New Orleans is a city awaiting for the best version of itself. This is the kindest way I could say what was really going through my mind: New Orleans is a shitty place that is wasting all the great things that are available to it.

Food? I love cajun food, but street-level quality of the food is not that great, and expensive cajun food is very good but not paradigm-shifting. Beignet from Cafe Du Monde is delicious, but the cafe itself is disgusting. Most restaurants did not serve more than two types of hot sauce--Tobasco and Crystal.

Jazz? Shocking how few jazz clubs there actually were on Frenchmen Street. I would have a better shot at listening to good jazz in New York, Chicago or even Washington D.C.

Drinks? Cheap, disgusting garbage for 18-year-olds. One would think New Orleans would be the city for cocktails, or excellent local bourbons and rums. Not so.

Gambling? No riverboat casino. Just a sad little Harrah's.

Even the tarot card reading that I got off Bourbon Street was crap. And this is the U.S. capital of voodoo and occult!

I wonder if the city does not attract talent, the types of young, ambitious men and women with snobby aesthetics pursuing the better version of everything. (They are often referred to as "hipsters.")

Sunday, December 20, 2015

종교와 시민사회: 미국 모델 대 프랑스 모델

여러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혼재하는 공동체의 경우, 종교와 시민사회는 어떤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크게 미국 모델과 프랑스 모델이 있다고 생각하며, 두 모델의 차이는 종교와 시민사회 중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있다.

(모든 모델이 그러하듯이 아래 모델들은 몇 단계의 추상화를 거쳐 나온 결과이며, 현실은 모델과 방향성은 같으나 일치하진 않는다.)

미국 모델은 위와 같다. 여러 종교 (작은 원)들이 중앙에 모여 시민사회를 형성한다. 일종의 종교 공화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여러 개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세워진 나라이다. ("다 기독교 아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18세기 유럽인들의 관점에선 퀘어커교와 영국 국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감이 있다.) 심지어 몇몇 주는 *오직* 종교의 자유만을 위해 세워진 것을 감안하면 (이를테면 펜실베니아는 퀘이커교도들이 설립한 주), 위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역사적 결과물이다.

반면 프랑스 모델은 아래와 같다.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기존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천주교에 대한 의식적 저항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종교의 영향을 거부한 세속적 사상 (laicite)에 기반하여 작동한다. 이 형태 또한 프랑스의 역사적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이 두 모델의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 미국의 시민사회는 중심이 비어있다. 다양한 종교의 공약수로 형성된 시민사회이기 때문에, 미국의 시민사회는 자체적인 동력이 없다. 그러므로 미국의 시민사회는 흰색으로 처리했다.
  • 프랑스의 시민사회의 중심은 세속주의며, 이것은 자체적인 동력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독자적 색깔이 있다.

  • 궁극적으로 보면 미국에선 무신론자는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필수적인 공약수 중 하나 (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 궁극적으로 보면 프랑스에선 종교인은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시민사회의 중심동력인 세속주의와 배치되기 때문이다.

  • 미국의 시민사회는 수축의 압력을 받는다. (화살표 방향 참조) 공약수의 크기에는 최대 한계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의 공공영역은 제한되어 있으며, 공공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계약과 거래의 양상을 띤다.
  • 프랑스의 시민사회는 팽창의 압력을 받는다. 만인의 이성적 사고의 기반한(다고 생각하는) 세속주의에는 스스로의 범위를 제한하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의 프랑스의 공공영역은 미국의 공공영역보다 비대하며 (도면의 크기 참조), 공공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하나의 이상을 향한 자기 혁신의 양상을 띤다.

  • 미국은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공약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종교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유대인 여성은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는 경우 유대교가 인정하는 이혼을 할 수 없지만, 미국 법원은 이에 개입하지 않는다. 
  • 프랑스는 종교의 사회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시민사회 자체의 동력으로 대체한다. 특정 종교가 시민사회 자체의 동력과 크게 유사한 경우 (이를테면 천주교)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대체 과정은 매우 지난하다.

  • 미국은 새로운 종교를 흡수하기 쉽다. 최소의 공약수만 받아들이면 바로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무슬림은 유럽의 무슬림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주류사회에 동화된다. 타종교에 대한 차별과 적대는 공약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선에서만 이루어진다.
  • 프랑스는 새로운 종교를 흡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종교의 사회적 부분을 시민사회에 완전히 내놓은 다음에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새로 진입하는 종교에게 이는 지나치게 값비싼 거래이다. 프랑스 시민사회 형성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종교 (=천주교) 정도만이 이러한 거래를 할 역량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든 새로운 종교는 차별과 적대를 받는다.

Wednesday, August 12, 2015

Writing About Writing

I never identified with writers who agonize over writing. Certainly their struggles are legitimate, but that simply has not been me. I think, and I write. Then I think some more, and I edit what I wrote. It has always been a fast process. I am a fast writer.

What I did not realize until recently is that I have a limited reservoir of writing in me. It doesn't matter what I write about--I can only write a certain amount in a given period of time. This reservoir is a scarce resource from which I, currently, draw in order to write a number of things except the blog and the book.

Walking away from them was easy--too easy that it scared me a bit. I need to return to them. So I write to remind myself.

Monday, July 13, 2015

Layperson as a Sanction Giver in the Internet Age

One of the distinctive features of the Internet age is the manner in which social etiquette is enforced. The mechanism itself is not new: it is in essence peer pressure, which has existed as long as the human race has existed. The distinctive part is the seeming disproportion between the violation and the punishment. For a thoughtless comment on the Internet, a job and livelihood are commonly lost.

Why is this so? One reason may be that people rarely think of themselves as sanction-givers. People usually think of themselves as merely expressing moral outrage, unaware that such expressions, once piled up, are sanctions in and of themselves. 

Some may be aware that their expressions are also sanctions, but unaware of the scale and proportionality of sanctions. This is partially because one person is unable to properly anticipate the effect of one's statement multiplied by the thousands. It is also partially because people simply are not trained--not even informally--as a sanction-giver. Expression of outrage requires no training; the moral intuition takes care of that. But the moral intuition is insufficient to create an effective sanction giver, who is essentially a policy maker. What level of sanction is enough to correct behavior? What level of sanction is fair, compared to other cases? Intuition alone does not answer these questions; a rigorous rational inquiry must also follow. Moral intuition unchecked by rational inquiry is what we see on the Internet--the permanent state of righteous indignation, seeking the next witch to burn.

Monday, May 25, 2015

기독교의 핵심

사람들이 모두 다른만큼, 신앙에 다다르는 길이 전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 존 칼뱅, C.S. 루이스와 티모시 켈러의 글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 신학자들이 설파한 기독교의 핵심에 크게 공감하여 신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티모시 켈러의 이 설교를 제 언어로 해석한 것입니다. 내용은 많이 비슷하지만 번역은 아닙니다. 신앙을 첫 접하는 사람들,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십계명이 무엇인지, 그 중 제1계명이 무엇인지는 다들 아실겁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이건 대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 "우상"이 진정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십계명에 등장하는 "우상"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아주 어려운,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해야 합니다. 즉: 당신은 왜 삽니까? 이렇게 자살하기 쉬운 세상에서, 왜 꾸역꾸역 아침에 일어나 밥을 입에 밀어넣고 그닥 가고 싶지도 않은 학교나 직장에 나갑니까? 내일은 뭐가 달라지길래 오늘을 사나요? 

이런 질문이 어렵다면, 반대로 접근해도 됩니다: 당신의 최악의 악몽은 뭔가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살할 것 같은가요? 직장에서 해고 당하면? 돈이 다 없어지면? 가족이 전부 죽으면? 사고를 당해서 얼굴이 흉칙하게 망가지면? 

여기서 나오는 대답이 당신 삶의 의미이고, 당신의 존재를 떠받치는 당신의 신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우리 주변에선, 직장과 커리어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커리어에 모든 것을 던집니다. 가족과의 화목도, 자신의 건강도 안중에 없고, 그저 일에 목숨을 겁니다. 오지의 원주민이 화산의 신에다 처녀를 공양하듯, 이들은 "커리어"라는 우상에다가 자신의 가족과 건강을 팔아넘깁니다. 

"자녀"라는 우상도 흔합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부모들은 자녀에 모든 것을 겁니다. 그렇게 과도한 기대에 엇나가버리는 자녀들의 모습 또한 흔합니다. "자녀"를 우상으로 삼은 부모는, 잘못돼버린 자녀를 보는 순간 온세상이 무너져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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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February 12, 2015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0. 열면서

요즘 트위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태그가 유행하고 있고, 저는 거기에 동참하지 않겠다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은 상당한 (대부분 부정적인)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반향의 대부분은 별반 대꾸할 가치가 없는 정념의 발산이었지만, 진중하게 반론을 제기하신 분도 간혹 계셨습니다.


반론 트윗 내용을 연결했습니다: 
"흥미로운 논의군요.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선 한 여성이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보단 한 남성의 선언이 훨씬 큰 파급력을 지닙니다. 기득권층이기 때문이죠. 흑인을 지지하는 백인들처럼. 이런 상황에선 선언이 가벼워질수록, 하나의 패션이나 유행에 가까울수록, 여성운동에겐 전략적으로 좋습니다. 지금처럼 단순한 선언 조차 무겁게 여겨지는 분위기는 운동에 매우 장애가 되지요. 가벼움은 무기입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진짜 페미니스트"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선언을 저어하는 것은, 1. 현대 한국에서 이 선언이 다양한 측면으로 얼마나 무거운지 반증하며, 2.선언을 더욱 무거이 만드는군요. 사회운동은 어디까지나 숫자의 문제이며, 허수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가벼워 유행이 된다면 그건 전략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큰 효과를 가져옵니다."
제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 싶어서 이 포스트를 씁니다.

1.  하나의 일화

"흑인을 지지하는 백인" 얘기가 나왔으니, 그와 비슷한 일화를 하나 소개 드리겠습니다.

제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 낯간지럽지만,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합니다. 전 대학 시절부터 미국 인종관계에 관심이 많아 그때부터 관련 활동에 투신해왔습니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한국과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제 블로그를 운영한지는 거의 10년이고, 졸블로그가 나름의 인기를 모아 제법 영/미 주류 언론에도 소개되고 기고도 하고 있는 위치입니다. 즉, 최소한 아시안 아메리칸 사회에서 전 순전한 필부필부는 아니란 말씀입니다. 곧 설명드릴 사건에 대한 배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런 설명을 드립니다.

콜베어 리포트 배너입니다.
(source)

미국 인기 시사 코메디 프로그램 중 "콜베어 리포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년에 이 프로그램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을 차별한다고 보일 소지가 있는 개그가 나왔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곧 아시안 아메리칸 활동가들이 반응했고, 전선이 짜여졌습니다. 강경파는 "이것은 차별이다, 사과해야한다"라는 주장이었고, 제가 속한 온건파는 "전체적 맥락을 보면 차별할 의도가 보이지 않으니 넘어가야한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강경파들은 강경파답게 온건파에게 "배신자"라며 맹공했습니다. 제게도 엄청난 욕설과 비난이 쏟아졌죠. 활동하면서 당연히 있는 일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저를 가장 극렬하게 공격한 사람들은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아니라,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에 끼어있는 백인 활동가들이었습니다. "나는 저것을 차별로 보지 않는다"라고 했더니 백인활동가들이 저보고 "너는 백인 우월주의에 찌들은 인종차별주의자다"라고 하기도 했고요. 평생 1초도 인종을 이유로 차별받아보지 않은 이들이 20년 가까이 활동을 해온 저에게 "네 생각은 상관없고, 우리가 이것은 차별이라고 정했으니 받아들여라"라고 주장하는, 지극히 우스운 꼬락서니였습니다.  

제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태그를 달 수 없는 이유는, 저런 백인 활동가의 우스꽝스런 모양새를 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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