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열면서
요즘 트위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태그가 유행하고 있고, 저는 거기에 동참하지 않겠다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은 상당한 (대부분 부정적인)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반향의 대부분은 별반 대꾸할 가치가 없는 정념의 발산이었지만, 진중하게 반론을 제기하신 분도 간혹 계셨습니다.
반론 트윗 내용을 연결했습니다:
"흥미로운 논의군요.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선 한 여성이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보단 한 남성의 선언이 훨씬 큰 파급력을 지닙니다. 기득권층이기 때문이죠. 흑인을 지지하는 백인들처럼. 이런 상황에선 선언이 가벼워질수록, 하나의 패션이나 유행에 가까울수록, 여성운동에겐 전략적으로 좋습니다. 지금처럼 단순한 선언 조차 무겁게 여겨지는 분위기는 운동에 매우 장애가 되지요. 가벼움은 무기입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진짜 페미니스트"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선언을 저어하는 것은, 1. 현대 한국에서 이 선언이 다양한 측면으로 얼마나 무거운지 반증하며, 2.선언을 더욱 무거이 만드는군요. 사회운동은 어디까지나 숫자의 문제이며, 허수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가벼워 유행이 된다면 그건 전략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큰 효과를 가져옵니다."
제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 싶어서 이 포스트를 씁니다.
1. 하나의 일화
"흑인을 지지하는 백인" 얘기가 나왔으니, 그와 비슷한 일화를 하나 소개 드리겠습니다.
제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 낯간지럽지만,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합니다. 전 대학 시절부터 미국 인종관계에 관심이 많아 그때부터 관련 활동에 투신해왔습니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한국과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제 블로그를 운영한지는 거의 10년이고, 졸블로그가 나름의 인기를 모아 제법 영/미 주류 언론에도 소개되고 기고도 하고 있는 위치입니다. 즉, 최소한 아시안 아메리칸 사회에서 전 순전한 필부필부는 아니란 말씀입니다. 곧 설명드릴 사건에 대한 배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런 설명을 드립니다.
콜베어 리포트 배너입니다. (source) |
미국 인기 시사 코메디 프로그램 중 "콜베어 리포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년에 이 프로그램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을 차별한다고 보일 소지가 있는 개그가 나왔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곧 아시안 아메리칸 활동가들이 반응했고, 전선이 짜여졌습니다. 강경파는 "이것은 차별이다, 사과해야한다"라는 주장이었고, 제가 속한 온건파는 "전체적 맥락을 보면 차별할 의도가 보이지 않으니 넘어가야한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강경파들은 강경파답게 온건파에게 "배신자"라며 맹공했습니다. 제게도 엄청난 욕설과 비난이 쏟아졌죠. 활동하면서 당연히 있는 일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저를 가장 극렬하게 공격한 사람들은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아니라,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에 끼어있는 백인 활동가들이었습니다. "나는 저것을 차별로 보지 않는다"라고 했더니 백인활동가들이 저보고 "너는 백인 우월주의에 찌들은 인종차별주의자다"라고 하기도 했고요. 평생 1초도 인종을 이유로 차별받아보지 않은 이들이 20년 가까이 활동을 해온 저에게 "네 생각은 상관없고, 우리가 이것은 차별이라고 정했으니 받아들여라"라고 주장하는, 지극히 우스운 꼬락서니였습니다.
제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태그를 달 수 없는 이유는, 저런 백인 활동가의 우스꽝스런 모양새를 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2. 가벼워질 수 없는 이유
"선언이 가벼워질수록, 하나의 패션이나 유행에 가까울수록" 좋다고 하셨죠. 다른 여러 사람도 "당장 뭔가 대단한 걸 하라는 것도 아니고, 태그 하나 다는 것이 무슨 대수냐"라는,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그런 말에 저는 이렇게 반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그 태그에 별 의미가 없다면, 제가 달건 안 달건 무슨 상관인가요?"
이건 제 성격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전 직업병이 있어서, 단어 하나하나의 뜻, 개념어의 의미에 지극히 민감합니다. 때문에 "페미니스트"처럼 함의가 큰 단어를 패션 악세사리처럼 달고 다니는 것은 제겐 무리입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지향점이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단순한 패션 악세사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전 회의적입니다.
"사회운동에 허수란 없다"라는 말씀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실질적 효과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운동의 숫자는 전부 허수입니다. 엄청난 숫자를 동원하고도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인터넷 운동은 너무 많아 일일히 열거할 수도 없으니, 두 가지 예만 들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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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에 미국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시작했던 해쉬태그 캠페인입니다. 보코 하람에게 납치된 천 명의 나이지리아 소녀들을 구해달라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이 캠페인에 동참하여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이 태그를 달았습니다. 기부금도 줄을 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사람 중 하나인 미국 영부인이 시작한 이 캠페인, 실효를 거두었을까요? 천 명의 소녀들은 다 돌아왔을까요? 돌아왔는지 안 돌아왔는지 지금 신경쓰는 사람이나 있습니까?
국내 예를 들어볼까요? 세월호 이후 반응은 어떻습니까? 사고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 프로필에 노란 리본을 달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이 "우리가 잘못 했다, 잊지 않겠다, 이런 사고는 다시는 없어야한다"라고들 했죠. 정말 그렇게 됐나요? 몇 달만에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가 터져 많은 생명들이 스러졌습니다. 그 많던 노란 리본과 자책의 목소리가 판교의 희생자들이 추락할 때 밑에 쿠션이라도 깔아주던가요?
오직 진실만이 진실이며, 실질적인 것만이 실질적입니다. 우리가 떠드는 말은, 실존적 현상을 불러일으키기 전까지는 공허할 뿐입니다.
3.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페미니스트"라는 패션 악세사리를 달 생각이 없습니다. 그 단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 단어로 제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 또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단어의 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 하면, 그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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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고의 가수 중 하나인 비욘세는, 최근 공연에서 위 사진처럼 거대하게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여 큰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내부적 반박이 들어왔습니다. 저명한 페미니스트 벨 훅스는 이러한 시도는 "안티-페미니스트"적이며 비욘세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테러리스트"나 마찬가지라고 맹비난했습니다.
이 외에도 페미니스트 내부의 결은 무한합니다. 그 어떤 사회운동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제가 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한다면, 그 다양한 결 중 내가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도 정해야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건 앞서 말씀드린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좌표 설정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배우고 관찰하고 숙고한 다음 결정하면 되지 않냐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결정은 언제나 틀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실존적 경험에 의거하지 않은 좌표 설정은 현학적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득권을 지닌 남자이고, 평생 여성이 겪는 차별을 1초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희 집은 부모님과 남동생 하나 뿐이라, 심지어 대리공감할 수 있는 누이조차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자정하려 노력해도 제 안에 성차별적 요소가 독소처럼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독소는 "페미니즘"이란 개념어를 이해하려는 제 지적 시도를 굴절시키고, 감염시킵니다.
이러한 감염은 실질적 해악을 초래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기득권층인 제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면, 특히 외부적에서 봤을 때 나름의 긍정적 효과는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며 "페미니즘"이란 집단에 참여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의 내적 역학 또한 바뀌게 됩니다. 저는 기득권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무게중심이 제 방향으로 어느 정도 이동하겠지요. 여기에 제가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을 대입하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여성에게 목소리를 주는 페미니즘의 본연을 저버리게 됩니다.
제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저도 저를 공격한 백인 활동가 꼴이 나겠지요. 평생 여성이 겪는 차별을 1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남자꼭지가, 현학적 논리를 구사하며 내 반대입장에 서있는 여성이 직접 겪은 경험을 깔아뭉개는 희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4. 하지만 지지는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같은 운동을 하는 세력 내에서도, 기존 사회의 기득권층이 그 운동이 본디 대변하는 비-기득권의 목소리를 뺐는 상황은 이미 충분히 연구가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인종운동 내에서는 Critical Race Theory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선의를 가지고 비-기득권층을 돕고자 하는 기득권층이 빠지는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같은 기득권층은 어떻게 해야 이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요? Critical Race Theory에 바탕을 둔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옆으로 피해줘야 합니다. 제가 프로야구팀을 아무리 사랑하고 돕고 싶다하더라도, 제가 운동장에 난입해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건 민폐일 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관중석에서 박수도 쳐주고, 응원가도 부르고, 기념품도 사주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도 필요합니다. 관중 없는 프로 경기는 없으니까요.
비유를 걷어내고 말하자면, 일단 제가 감히 라벨을 붙이고 그 라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는 행위는 피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라벨을 붙인 순간 의미부여는 피할 수 없습니다.) "페미니스트"라는 라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린 당사자들이 정할 일입니다.
이런 자세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무심함이 아니며, 반대는 더더욱 아닙니다. 제 안에 성차별적 독소가 있을지언정, 남녀가 평등하다는 대전제에 반대할 정도로 미개하진 않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해왔듯이, 개별적이고 현실적 사안에 집중하려 합니다. 성차별에 대한 현실적 사안은 많고도 많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안에 대해 공부하고, 사안의 당사자들의 입장을 살펴본 뒤, 그 입장에 비추어 제 위치를 설정하고, 행동하는 것. 그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가닥을 잡더라도 실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저는 여전히 남녀평등적 가치를 지향하고, 거의 대부분 사안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선호하는 방향을 지지하고 투표할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는 제가 "페미니스트"라는 라벨을 달 건 달지 않건 차이가 없습니다.
아-- 제가 제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든 아랑곳 없이, 그저 시키는 것을 개처럼 따르지 않는 존재에 분노하는 어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웃음)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