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포스트에서 설득보다 강한 힘은 개종이라고 소개했다. '개종의 예술'을 논하기 전에, 설득과 개종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왜 개종은 설득보다 강력한지에 대한 논의가 선결되어야할 것 같다.
'개종'이란 단어는 필연적으로 '종교'라는 개념을 소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종'은 꼭 종교를 바꾼다는 내용은 아니다. '세계관'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세계관을 바꾼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나의 정의는 이렇다: 담론의 시작점을 바꾸는 것. 거대하고 높은 산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첫 걸음을 어떻게 내딛고, 열 번째, 백 번째 걸음을 어느 방향으로 내딛느냐에 따라서 내려오는 길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그 큰 산의 표면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발걸음의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것이 '설득'이라면, 시작하는 산 자체를 바꾸는 것이 '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설득이 전투의 기술이라면, 개종은 그 전투가 시작도 하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외교술이다. 때문에 자연히 개종은 설득보다 강하며, 진정한 사회적 변혁은 대개 설득이 아닌 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방백. 인간사회는 뚝뚝 떨어진 산 하나씩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큰 산이 모이고 겹친 고원이며 서로 다른 산에서 내려와도 아래쪽에 겹치는 길은 많다는 점은 상기해야할 것이다.)
이 사실은 인간사회 모든 면에서 드러난다. 이를테면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란 개념을 통해,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증거를 쌓아올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 (이 포스트에서 쓰이는 '세계관'이란 개념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이 등장하여 기존의 사실을 재정돈함으로서 이루어진다고 관찰했다. 즉 사실 하나하나를 연구하는 것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정돈하여야하는 원칙을 바꾸는 것이 과학의 발전이란 것이다.
개종이 설득보다 강하다는 것은 이론적인 논의만이 아니다. 임상학적으로도 개종된 인간은 설득에 면역이 생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2013년 예일대학교 실험에서는, 실험군을 둘로 나누어 실질적으로 같은 응용수학문제를 풀게 했다. 하나의 실험군에게는, 지문에 정치색이 짙게 들어간 응용문제를 주었고 (총기소유에 대한 내용), 또 다른 하나는 정치색이 없는 문제를 주었다 (단순 피부병에 대한 내용).
결과는? 수학적으로는 완전히 같은 문제였지만, 정치색이 들어간 문제의 정답률은 널을 뛰었다. 문제가 본인의 평소 정치적 성향과 합치한 경우 정답률은 크게 상승했고, 정치적 성향이 반대인 경우 정답률은 하강했다. 게다가 이 추세는 수학을 잘 하는 사람일 수록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즉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평소의 정치적 성향 (=이 또한 '세계관'의 일부)에 거스르면 글자 그대로 *지능이 떨어진다*. 세계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설득'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이성적 사고의 틈새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현실적 경험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이념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취사, 해석한다는 건 두 번 말하면 입 아프다. 세계관이 '친일파 타도'인 사람에게는 영덕 대게 그림도 욱일기며, 세계관이 '때려잡자 빨갱이'인 사람에게는 전두환도 민주주의의 화신이다. 이들에게 설득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이념적 성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언정, *세계관이 없는 사람이란 없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이 유연한 사람도 결국에는 본인의 세계관과 합치하는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이고 설득된다. 즉 설득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앞서 말한 설득의 세 요소뿐만 아니라, 상대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나의 세계관과는 어떻게 다른지도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개종은 쉽지 않다. 설득보다 효과가 큰만큼 난이도도 훨씬 높다. 일생에 한 번이라도 개종을 겪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며, 여러 타인을 개종시키는 것은 물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엄청나다. 물 위를 걷는 것은 초현실적일지 모르나, 개종은 현실 자체를 휘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