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30, 2014

2014년 8월 29일자 퇴고와 기교

본진 블로그에 이민자들은 어떤 나라의 스포츠 팀을 응원해야 하는가에 대해 썼다.

I was alternately giving the play-by-play, singing the Cal fight song, and chanting and screaming incomprehensibly. In a bus full of tourists who couldn't care less.

- 두번째 문장은 주어와 동사가 없이 부사구 하나만 덜렁 떠있는 비문이다. 첫 문장에 등장한 내가 한 짓거리는 꽤 우습다. 그 짓을 사람이 가득 찬 버스 안에서 했다는 것은 더더욱 우습다. 개그 포인트를 향상시키려면 이런 식으로 비문을 무릅쓰고 일종의 원투 펀치를 날리는 것도 방법이다.

When the Lakers make their once-a-year trip to Washington D.C., I always go--although the Wizards bilk fans like me by charging $200 for a crappy seat.

- 좋은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글쓰기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문장에서 bilk란 단어는 "바가지 씌우다"라는 뜻이며, 한국어의 "바가지 씌우다"에 담긴 억울한 감정이 똑같이 묻어나는 단어이다. 만약 여기에 예를 들어 overcharge 같은 단어를 썼다면, 분명 문어적 뜻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달되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Overcharge는 주로 공문서에 등장하는 단어이다.)

- 대쉬(--)는 문장의 리듬감을 조절하는 데에 아주 유용하다. "go" 다음에는 대쉬 대신 쉼표를 넣어도 적절했을 것이나, I always go 같이 짧은 구절에 앞뒤로 쉼표를 넣으면 문장이 늘어지는 느낌이다. 숨 돌릴 기회를 주면서도 다음 내용으로 재빨리 움직이기 위해 대쉬를 넣었다. 하지만 나는 대쉬를 지나치게 남용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조심하는 부분이다.

This is not going to be a flip dismissal about the importance of sports loyalty, of the kind often given by people who do not understand the value of sports and dismiss it as grown-ups playing with a ball.

- 이런 문장에 "of the kind"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여 중문을 만들 수 있다면 그대는 영작 최고봉에 거의 다 온 셈이다. "of the kind" 같은 접속사 없이 같은 내용을 전달하려면 내용이 겹치는 문장 두세 개가 등장할 것이나, 적절한 접속사로 간명한 문장 하나로 연결해낼 수 있다.

Each match is a work of art, reflective of the nuanced highs and lows of the life itself. 

- "art"와 "reflective" 사이에는 "which is"가 빠져있다. 이런 식으로 긴 형용사구를 명사 뒤에 놓아 수식하는 모양새는 아주 자주 쓸 수 있는 고급형태이므로, 꼭 숙지하기 바란다.

It is one thing to deeply engage in a metaphor, quite another to allow it to consume reality. 
--> It is one thing to deeply engage in a metaphor, quite another to let it consume reality.

- 문법적 요소도 단어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이 문맥에서 allow와 let은 뜻이 같으나, let은 사역동사이기 때문에 뒤에 동사원형 (consume)을 직접 가져올 수 있다. 즉 allow를 let으로 바꿈으로서 문장에서 to라는 단어를 뺄 수 있는 것이다. 단어를 가장 적게 쓰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부 전달하는 것이 간명한 글쓰기의 기본이다.

But if we should treat our sports opponents as enemies on the battlefield, there is no reason why we should not call for more bean balls to the head, more chop blocks designed to break the knee. 

- "more . . .,  more . . ."로 시작하는 동격구에 주목. 동격구를 잘 활용하면 and나 or 같은 접속사 없이도 리듬감있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

Sunday, August 24, 2014

2014년 8월 24일자 퇴고와 기교

주로 영어로 글을 쓰다보니 영어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언젠가 영어공부에 대한 개인적 소회를 풀어놓으려 한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예시를 위해 내가 본진 블로그에 글을 쓰고 퇴고하면서 내가 초본에 썼던 내용을 교정하거나, 무언가 작가로서의 기교를 발휘한 부분을 몇 군데 소개하려 한다. 가능하면 본진 블로그에 글을 하나 쓸 때마다 이런 포스트를 병행할 예정이다.

오늘자 포스트에는 드렁큰 타이거에 관한 내용을 썼다.

Korean hip hop can be considered a forest, with many a skilled hand that planted, tended and lovingly nurtured each tree.

- "many a [단수형]"은 문어적 표현으로, "정말 많다"는 느낌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 "planted, tended and lovingly nurtured"은 선호하는 형태. [동사]+[동사]+[동사]는 갑갑해지기 쉬우므로, 마지막 동사 앞에 부사를 넣어 [동사]+[동사]+[부사]+[동사]의 형태로 리듬의 변화를 준다.

The hip hop-esque music from the transitional period of 1990s is sometimes referred to as "rap dance," a genre that is still alive and well in Korea.

- "rap dance" 다음에는 "which is"가 빠져있다. 동격구를 사용함으로서 단어 두 개를 없앨 수 있다면 그 길을 취하는 것이 좋다.

But they did grow a forest from what seemed to be a hostile, infertile land --> But they did raise a forest from what seemed to be a hostile, infertile land

- "키워냈다"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처음에는 "grow"라는 동사를 썼으나, "raise"로 바꿨다. 진짜 숲이나 식물을 키워냈다는 함의를 전달하려면 grow가 옳으나, 아이를 키워내는 듯한 과정의 비유라는 생각 때문에 raise가 더 효과적이라고 느꼈다.
- "hostile, infertile land":  "very" 같은 의미 없는 강조어를 피하는 것은 영작의 기본 규칙 중 하나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렇게 유의어를 두어번 반복하는 식으로 한다.

Wednesday, August 13, 2014

한국 관련 믿을 만한 외신

외신이 한국에 대해 무슨 말을 하나 관심들이 많다. 국제적으로 한국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관심 갖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미국은 이걸 너무 안 해서 문제다.) 하지만 외신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문제다. 국제사회가 보고 있다는 중압감을 (상대편에) 발휘하고 싶고, 한국의 언론은 믿을 수 없다는 의식도 있기 때문에, "외신이 이랬더랜다"라는 전가의 보도가 휘둘려 지는 모습이 아주, 아주 자주 보인다.

외국 사는 입장에서 볼 때, 그 전가의 보도는 종종 우스꽝스러운 썩은 지푸라기다. 아무래도 한국에 사는 경우 어떤 외신은 공신력이 있고 어떤 외신은 "찌라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가 크다. 게다가 이름난 외신이라 하여 한국에 대해 잘 안다는 보장도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임 (Time Magazine; 런던의 "타임즈"가 아니다) 이나 BBC가 한국에 대해 보도하는 모습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인상비평에 불과한 외신 기사를 들고 "세계 여론이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며 목청 높이는 것은 보기 민망할 정도다.

거의 대부분의 외신은 한국에 지국이나 상주 특파원이 없고, 홍콩이나 일본에 위치한 "아시아 특파원"이 한국 뉴스까지 커버한다. 이러한 "아시아 특파원"들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도 없고 한국에 별다른 인적 네트워크도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나오는 영자지와 한국에 대하여 쓰는 영어 블로그에 기반하여 기사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블로그 AAK!의 내용이 약간만 바뀌어 기사화된 경우도 많다. 링크라도 걸어주면 양반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외신은 한국에 상주하는 프리랜서 기자들에게 많이 의존한다. 한국에서 뉴스거리가 나오면 급히 프리랜서 기자들에게 연락해서 기사를 만들어 내어 싣는 형식이다. 문제는 외신 편집부는 대부분 한국에 대해 상당히 기본적인 배경도 없기 때문에 좋은 기사, 기고를 부실한 기사, 기고와 구분할 역량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이를테면 프리랜서가 CNN의 명패를 달고 기사를 내었다 하여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CNN 수준의 기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도저히 기자 단위로 찾아읽을 여력이 없다면, 뉴욕 타임즈, 월 스트리트 저널,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 타임즈를 추천한다. 이 네 군데 신문/잡지는 한국에 상주하는 특파원이나 한국 지국이 있고, 때문에 한국에 대한 기사의 질이 다른 외신에 비해 월등히 높다. 다루는 정보나 논평의 깊이가 한국 국내 언론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한국 관련 뉴스만 다루는 블로그를 개설한 WSJ의 최근 약진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외신의 한계 때문에, 한국 관련 외신 뉴스는 기자 단위로 신뢰도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 개인적으로 한국 관련 뉴스에 대해 내가 가장 신뢰하는 기자들과 그들의 소속은 다음과 같다:

- Choe Sang-hun [최상훈]:  뉴욕 타임즈 한국 특파원
- Alastair Gale:  WSJ 한국 지국장
- 그 외 WSJ의 Korea Real Time 블로그 소속 정규 기자 전원. (외부 기고인들은 제외.)
- Simon Mundy:  파이낸셜 타임즈 한국 특파원
- Geoffrey Cain:  프리랜서. 주로 Global Post에 가장 자주 등장.
- James Pearson:  로이터 한국 특파원

그 외 더 있으나 지금 당장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날 때마다 때때로 목록에 추가하겠다. 이코노미스트는 원칙적으로 개인 기자 이름을 기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참조 바란다.

첨언 1 - 1980-90년대의 기억이 남아서인지, 타임紙를 정론지로 여기고 많은 신뢰를 부여하는 경우가 잦다. 유통기한이 지난 인식이다. 타임은 아시아를 커버할 능력을 잃은 지 오래며, 다른 뉴스에서도 미국 여론을 선도할 역량을 잃은 지 최소한 10년은 지났다. 여론선도력이 뛰어난 미국 언론사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트에서 설명하겠다.

첨언 2 - 한국에서 "외신이 이렇게 보도했다"며 강한 정치적 주장이 뒤따르는 경우, 가급적 원문을 읽어볼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억지스런 번역 혹은 노골적인 오역으로 아전인수격 주장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으며, 심지어 대형 언론사도 종종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듯하다.

Sunday, August 10, 2014

찜찜한 그녀

::스포주의::

주변에서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Her"에 열광하는 반응이 여럿 보인다. 하지만 내가 Her를 보았을 때는, 잘 만든 수작이나 왠지 찜찜하다는 감상이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좀 시간이 걸렸다.

왜 찜찜했는가. 아마도, 티어도어와 사만타의 관계가 어딘가 비정상적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으나, 티어도어와 사만타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하기엔 뭔가가 조금 뒤틀려있다. 언제나 보던 낯익은 광경이 어딘가 살짝 바뀌어 있을 때 알게모르게 느껴지는 껄적지근함. 이게 나의 감상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이 빠져있는가, 티어도어와 사만타의 관계에선? 사만타에 대한 "호기심"이 빠져있지 않은가 한다. 사랑은 하면 할 수록 상대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Her는 오직 티어도어의 감정에만 집중한다. "실제"로는 티어도어가 사만타와 대화하며 사만타에게 오만 질문을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영화에선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아내는 음악가다. 아내와 만나기 전 음악의 세계는 나에게 낯선 것이었다. 우리가 만나 오래 교제할 수록 나는 아내와 음악과의 관계에 대해 더욱 더 많은 질문을 했다. 어떤 음악이 좋은가. 왜 좋은가. 그 음악을 연주할 때는 어떤 느낌이 드는가.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사랑할 수록 사랑하는 이의 자아를 형성하는 큰 부분에 대해 더 궁금해졌으며, 답을 깊이 알게될 수록 더 깊이 사랑했다.

사만타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이 "여성"과 관계를 맺는 티어도어는, 왜 더 사만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것인가? 티어도어가 사만타에게 그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나라도 던졌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오직 사만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사만타의 사랑이 인간이 일반적으로 하는 사랑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티어도어가 알아버린 순간, 그와 사만타의 관계는 무너져버린다.

사랑의 대상에 호기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 대상을 독립된 인격체로 취급하는 첫 걸음이다. 그 대상이 나를 향한 마음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만의 취향, 특성, 세계관 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더 알고자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누군가를 완전히 사랑하기 위한 선결과제이기 때문이다.

티어도어는 사만타를 사랑했는가? 본인은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나,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그렇다라고 선뜻 말하기 힘들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몇천명에게 동시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닌가. 티어도어가 이 사실에 무너져 내렸다는 것은, 독립된 개체로서의 사만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서의 사만타에 대한 별다른 고찰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티어도어에게 사만타는 인격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나며, "그녀"라는 영화제목을 떠올리면서 찝찝함은 배가된다. "Him"--그 남자, 그 녀석, 그 "사람"--이었다면 같은 수준의 영화가 나타났을까? 사만타는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을 뿐, 기실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하지만 티어도어는 별다른 고찰 없이 사만타를 여성이라고 간주하며, 인격체가 아닌 그의 감정적 욕구에 반응하는 객체로만 간주한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컴퓨터 프로그램이 "사무엘" 같은 이름을 사용하며 굵고 깊은 목소리로 대화했을 경우에도 티어도어는 그렇게 쉽게 객체화할 수 있었을까? 그런 객체화에 관객들은 같은 수준으로 열광했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Friday, August 8, 2014

Engaging with Keller - Iain Campbell & William Schwitzer (2013)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http://www.amazon.com/Engaging-Keller-Thinking-Influential-Evangelical/dp/0852349289/ref=sr_1_1?ie=UTF8&qid=1407534824&sr=8-1&keywords=engaging+with+keller 티모시 켈러 목사의 신학을 여러 신학자가 비평하는 책이다.

나는 30세가 되어서야 기독교에 입교했다. 나를 입교시킨 가장 큰 영향은 뉴욕 리디머 (Redeemer) 교회의 티모시 켈러 (Timothy Keller) 목사였다. 켈러 목사는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젊은층에게 호소력있는 설교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점차 신앙을 잃어버리는 현대사회의 총아인 대도시에서 설득력을 구현했기 때문에, 켈러의 신학은 미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내 개인적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겐 언제나 켈러의 저서를 권유하곤 한다.

때문에 반대의견을 듣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무결한 신의 뜻을 불완전한 인간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는 그 어떤 신학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렇게 지적으로, 예의를 갖추며 신학의 차이점을 논의하는 책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

한나절 짬짬히 읽었을 뿐이지만 벌써 60페이지를 넘겼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좋은 가독성이다.

Euny Hong - Birth of Korean Cool (2014)

아마존닷컴에서 2014년 8월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http://www.amazon.com/The-Birth-Korean-Cool-Conquering/dp/1250045118

P. 48에 내 얘기가 나온다. 책을 사서 본 친구가 내가 나왔다고 반가워하며 보내준 사진이다.


사서 봐야하나.

-첨- 내 글을 좋게 봐준 내용에는 감사하나, 저 문장은 아주 거슬린다:
"My favorite anonymous Korean American author of the blog "Ask a Korean" puts it best".
이런 식으로 썼어야했다:
"The Korean American author of "Ask a Korean," my favorite blog, puts it best".
첫 문장에선 "favorite"이란 단어가 수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익명의 한국계 미국인 AAK 블로그 작가가..."이나, "익명의 한국계 미국인 AAK 블로그 작가"는 이 세상에 한 명 뿐이므로 "가장 좋아하는"이란 수식은 어색하다. 문장의 숨도 너무 길다.

왜 이리 절망하는가

"이게 나라인가."

세월호 사건 이후 지금까지 자주 보이는 한탄이다. 오늘 읽은 신문 칼럼에도 이 표현이 보인다: "과연 이게 나라인가. 어이없고 기초도 기본도 무시된 유병언 수사, 반성도 개선도 없는 국회, 그리고 여전히 부정과 비리에 둔감한 사람들."

조금 의아하다. 세월호 사건은 물론 비통하다. 윤 일병 구타살인, 임 병장 총기난사 사건 또한 공분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 비통함과 공분이 왜 "이게 나라인가"라는 한탄으로 표출되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세월호 사건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대형사고는 아니다. 1995년, 삼풍백화점이 끔찍하다 못해 우스울 정도로 붕괴되었던 모습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의 사망자는 500명이 넘었다. 당시에 떠돌던, 잔해의 묻혀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참동안 들렸다가 하나씩하나씩 사그라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세월호 안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는 것만큼이나 안타깝고 속을 태운다. 그 큰 고급백화점 건물이 붕괴까지 이르게한 구태와 무능은 세월호 사건을 일어나게한 구태와 무능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다.

그 약간 전에는 성수대교 붕괴가 있었고, 같은 해에는 100명이 넘게 사망한 대구 상안동 가스폭발 사건이 있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에서는 200명 넘게 사망, 실종했다. 구태와 무능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월호와 비슷한 규모의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엔 국가의 기본적 기능을 의심하는 반응이 지금처럼 성행하진 않았다. 

작금의 한탄은 끔찍한 사건 직후에 나올 수도 있는 감정적인 반응이라 보기도 어렵다. 세월호 사건 직후 한겨레가 대문짝만하게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표제를 단 주간지를 내놓았을 때, 살짝 과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워낙 충격적인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지 100일이 가까워가는 지금까지도 "이게 나라인가"라고 자문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이 다른 거대 사고와 무엇이 다르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왜 슬픔을 넘어선 절망을 고집하는지, 이렇게 절망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다.

개장

이렇게 다시 저질러 버렸다. 본 블로그에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쓰는 것도 버거워하고, 두번째 블로그는 있는 듯 없는 듯 내박쳐놓은 상황에서, 염치도 없이 세번째 블로그를 개장한다. 이쯤 되면 읽지 않은 책과 보지 않은 DVR 녹화된 TV 프로그램과 쓰지 않은 블로그들을 모아놓고 원혼제라도 지내야 꿈자리가 성할 것 같다.

본디 계획은 본 블로그에 두 개의 SNS, 즉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연계하여 본 블로그에는 담기 어색한 자투리 생각들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페이스북은 영어, 트위터는 한글로 하여, 두 문화권을 아우르는 정보수집 기능을 겸했다.

그러나 오호 통재라, 자투리 생각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본인의 잉여력을 먹고 무한증식하여 140자에 담기엔 버거워졌다. (말이 너무 많아서 무한의 공간인 인터넷도 모자라다니, 난 여러모로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숙고 없이 SNS에 내뱉어 버리는 글은 나의 한국어 실력을 좀먹었다. 연습할 공간이 필요했다.

주로 트위터에 길게 써냈던 생각들을 좀 더 정제하여 담아내는 공간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가끔은 영어로 된 글도 등장할 것이다. 정기적 업데이트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